1500억 투자받아 배우 제대로 키워 '할리우드로 가는 길' 만들겠다"
단역에서 출발, '천의 얼굴' 배우로
싱글즈·온에어·자이언트 등 60여편 출연
'배우들에겐 왜 SM같은 회사 없을까' 답답함
'고향 선배' 서정진 회장과의 인연
2년 전 엔터 회사 맡아달라 제안 받아 수락
셀트리온의 영화 투자 설득…성공 이끌어
한국-할리우드 파이프라인 '큰 꿈'
스타 배우 영입보다 신인 교육시스템 갖춰
한미 합작 영화 등 글로벌 엔터기업 키울 것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셀트리온 사옥 사무실에서 만난 ‘CEO 이범수’의 목소리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배우 이범수’와 KBS2TV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빠 이범수’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범수는 지난해 3월 셀트리온이 설립한 배우 전문 기획사 테스피스엔터테인먼트 대표다.
“지난 1년여간은 ‘워밍업’ 기간이었어요. 최근 모회사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을 만나 투자 계획과 규모에 대한 협의를 마쳤어요. 올해 말 사명을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로 바꾸고 본격적인 콘텐츠 사업에 나설 예정입니다.”
연기는 인간 탐구하는 최고의 학문
이범수는 알려진 대로 ‘천(千)의 얼굴’을 가진 배우다. 1990년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해 지금까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년) ‘태양은 없다’(1998년) ‘싱글즈’(2003년) ‘외과의사 봉달희’(2007년) ‘온에어’(2008년) ‘자이언트’(2010년) ‘신의 한수’(2014년) ‘라스트’(2015년) 등 6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지닌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연기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배우가 됐지만 시작은 단역이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 행인 등 단역을 맡을 때도 “연기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연기에 최선을 다한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성장한 것 같다고 했다.
“연기야말로 인간을 탐구할 수 있는 최고의 학문이에요. 인간의 욕망·꿈·희로애락·흥망성쇠가 모두 담겨있어요. 좋은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좋은 영화가, 좋은 대사 한 마디가, 어떤 배우의 연기가 관객의 인생을 바꿀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래서 연기를 하기 전에는 언제나 진지해져요. 그렇게 자긍심을 느끼면서 배우 생활을 한 지 벌써 27년입니다.”
그는 지난 7월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북한군 인천방어사령관 림계진 역을 맡아 긴장감 넘치고 입체감 있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함경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해 탈북자 관객들로부터 북한 출신이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다. 영화 ‘짝패’와 ‘신의 한수’, 드라마 ‘라스트’에 이어 또 악역을 맡은 것에 대해 “전작과 또 다른 차이점을 만들어야 하는 도전을 즐긴다”고 했다.
체계적인 배우 육성 시스템 갖추겠다
연기로 모험을 즐기던 그를 연예기획사 대표로 이끈 건 서 회장과의 인연이었다. 같은 고향(충북 청주) 출신인 두 사람은 10여년 전 김장담그기, 연탄배달 등 사회봉사활동 현장에서 만나 친해졌다. 평소 엔터테인먼트산업에 관심이 많던 서 회장은 동향 후배인 이범수와 친분을 이어왔다. 그러던 차에 2014년 서 회장이 새로 설립할 회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학창시절(중앙대 연극영화과)부터 ‘배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배우가 됐는데도 후배들에게 배우가 되는 길을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어요. 가요계에는 연예계 3대 기획사라 불리는 SM, YG, JYP 등 조직적으로 가수를 키우는 회사가 있는데 배우들에겐 왜 그런 회사가 없나 하는 생각도 했죠. 기본에 충실한 배우를 키우는 회사의 필요성을 느끼던 참에 제안이 왔고,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유명 배우가 전면에 나서 연예기획사를 차린 경우는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1인 기획사이거나 배우 매니지먼트 위주 회사다.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자신이 전면에 나서 작품 활동과 함께 신인 배우를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나아가 영화와 드라마에 투자하고 제작도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소속 신인 배우들의 연기 수업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그의 설득으로 셀트리온은 ‘인천상륙작전’ 투자자로 나섰고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10억원을 투자해 20억원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회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즉시 전력감’인 스타 배우 영입은 고려하지 않아요. 신인 배우를 발굴·교육하고, 그들에게 현장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사가 제작·투자하는 작품에 좋은 배우를 공급하고, 배우들에게 현장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는 선순환 체계 구축이 우선적인 목표입니다.”
이 대표는 과거 방송사에서 공채 탤런트를 뽑은 것처럼 공채 배우를 모집할 계획이다. 그는 “기본에 충실한 신인을 계속 발굴하고 등용시킬 것”이라며 “셀트리온 출신 배우라는 것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장기적인 목표는 “한국과 할리우드 사이의 파이프라인 건설”이다. 국내에서 배우 매니지먼트와 드라마·영화 제작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류를 선도하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회사를 꿈꾸고 있다. “9월에 미국으로 가서 한·미 합작 영화 제작을 논의할 계획입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할리우드 유명 영화사·감독·배우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이 결정되면 우리 회사 배우들이 아시아 배우로 참여할 예정입니다.”
소속 배우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란 마라톤을 달리는 것과 같다고 얘기합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본연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주문합니다. 무엇보다 본인들이 하고자 하는 일로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이 대표는 “우리 회사는 이제 막 씨를 뿌렸다”며 “열매가 제대로 익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기만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아이들 연기하고 싶다면 적극 밀어줄 것
그는 지난 2월부터 매주 일요일 ‘아빠 이범수’로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그는 1년 전만 해도 육아예능에 출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초창기부터 출연 섭외를 받았지만 계속 거절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슈퍼맨’이 된 이유는 딸 소을(6)과 아들 다을(3) 때문이다.
“휴대폰을 고치러 갔는데 소을이 두세 살 때 찍은 사진들이 있는 거예요. 그 사진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죠. 그러다 문득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추억을 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쉬웠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마침 그때 ‘슈퍼맨’ 팀에서 다시 한 번 연락을 했더라고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신기해요. 그렇게 인연이 닿아 ‘슈퍼맨’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물리적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다”며 “이제는 밖에서 일하다가도 소을·다을이가 눈에 밟히고, 아이들도 아빠를 더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이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생각이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들의 행복입니다. 다른 진로를 고려하지 않고, 연기를 하라고 유도하고 싶진 않아요. 아이들이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배우라는 길이 굉장히 고되고, 힘들다는 걸 확실하게 말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문연배 한경텐아시아 기자 bretto@tenas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