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건너던 남성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차에 부딪힌다. 여성 행인이 달려가 그의 상태를 확인한다. 쓰러진 채로 눈을 뜬 남성은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이 광경을 본 한 백인 소녀가 깜짝 놀라자 한 남성이 귀띔한다. “걱정마. 한국 드라마잖아. 로맨스 전개를 위해 넣은 장면일 뿐이야.”

미국에 기반을 둔 글로벌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 비키(VIKI)가 지난 4월부터 방영 중인 웹드라마 ‘드라마월드’(사진)의 한 장면이다. 국내에선 넷플릭스가 이 드라마를 독점 서비스하고 있다. 비키가 처음 자체 제작한 이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살던 미국인 소녀 클레어가 평소 즐겨 보던 드라마 ‘사랑의 맛’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판타지물이다.

사랑의 맛은 한국 드라마의 상투적인 설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사랑의 맛 속으로 들어간 클레어도 주인공들과 함께 ‘한국 드라마의 법칙’이란 규범서에 따라 산다. 규범서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 간 진정한 사랑의 키스로 끝난다. 이야기에 온갖 우연과 굴곡이 나오지만, 결론은 언제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다. 기억상실증, 암, 교통사고 등 극단적인 상황은 줄거리 전개에 도움을 준다.’

등장인물부터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다. 남자 주인공은 잘생겼지만 다소 오만한 성격의 부잣집 아들이다. 성격이 까칠하지만 알고보면 순정파다. 세련된 ‘악녀’와 어려운 사정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캔디’가 그를 두고 경쟁한다. 남자 주인공의 엄마는 아들을 볼 때마다 “기업 경영권을 잇고 어서 결혼하라”고 성화다.

한국 드라마에서 화제가 된 장면을 그대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클레어가 손에 든 포기김치로 남자 주인공의 따귀를 때리는 ‘김치 싸대기’ 장면이 대표적이다. 클레어는 대사로 한국 드라마의 상투성을 직접 지적하기도 한다. 운전 중인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보며 말을 걸자 “운전할 땐 앞을 봐야 하는 거 아냐?”라고 한다. 어설프게 가려진 자동차 로고를 보고선 “이 로고는 왜 가려놨어?”라고 하고, 노골적으로 비추는 화장품으로 자신을 꾸민 뒤 “간접광고(PPL)가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한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웃음이 나올 만한 장면으로 가득하다.

감독이 미국인이라 미국 문화가 섞이는 오류도 보인다. 사장이 “그만 퇴근하세요”라고 하자 직원들이 “고마워요”라고 하거나, 빈소에서 주인공이 술잔을 두드려 이목을 집중시킨 뒤 단체 건배를 제의하는 장면이 그렇다.

비키는 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드라마를 북미를 비롯한 세계 시청자에게 공급한다. 태미 남 비키 대표는 “세계적으로 수천만명이 한류 콘텐츠를 즐긴다는 점에 착안해 첫 제작 콘텐츠의 소재로 한국 드라마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비키는 이 드라마를 39개 언어로 번역해 서비스하고 있다.

비키 관계자는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반응은 폭발적”이라며 “‘시즌2’ 요구가 빗발쳐 제작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