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신 연출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원작에 비해 이야기를 간소화 시키고 극을 2막 3장으로 밀도 있게 압축시킨다. 내전과 전쟁-누카 성 영주(게오르그 아바슈빌리)의 죽음과 부인의 도피-민중들의 삶-혼란-그루셰와 시몬의 사랑-그루셰와 미헬의 관계-22일간의 도피-반란군들과의 대립-유숩과 농부의 만남- 미헬의 성장과정과 모성애- 전쟁종전-아츠닥의 백묵원의 재판-그루셰의 승리-전쟁의 이어짐-평화기원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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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빈 공간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변적으로 장면을 끌고 갈수 있도록 간소화 시켰다. 그 주변으로 좌우, 중앙의 3면으로 객석을 올리고, 무대와 객석의 사이를 좁혀 브레히트의 서사극 구조와 마당놀이 공간을 융합해 브레히트와 창극이 융합된 무대공간으로 구조를 이룬다. 관객의 참여가 자연스럽고, 배우도 관객과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놀이적 공간이 된다. 놀이적 공간은 마당놀이 문화로 극을 유지하면서 감정에 집중, 극의 의존성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면서 관객체험은 넓힌다.
극에 빠져들 정도가 되면 웃음으로 뺨을 한 대 날리면서 ‘정신 차려’ 하는 식이다. 반복은 극이 종점을 향해 갈 때 까지도 웃음코드로 균형을 이루고, 과장된 연극적인 인물의 캐릭터와 소리는 장면 사이사이에 유쾌한 극중극으로 끼어든다. 극에 환상을 거부하고 공간을 통해 참여하면서도 냉소적이고 객관적인 시선만 남겨둔다. 그 틈으로 정의신 연출은 인물의 감정을 판소리로 밀어 넣고, 창극의 특수성들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브레히트와 창극의 간극을 밀도 있게 좁혀낸다. 역사 이야기의 차용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현실성과 거리를 좁힌다.
국립창극단 배우들의 대사는 걸쭉한 사투리로 툭툭 뱉어지고, 장면사이에 끼어드는 판소리체 대사들을 던지고, 받음은 절묘한 연극적 타이밍이 된다. 연출은 장면 사이에 창극적인 해학성의 끼어들기를 하면서 정의신 연출다운 장난 끼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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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평온했던 누카 성은 일순간에 전쟁으로 깨진다. 전쟁의 대립적 이념들이 충돌되면서 내전의 송곳은 마을민중들을 향한다. 내전은 민중의 감정을 갈라놓고, 진정성은 몰락한다. 파편화된 성을 지켜내는 것은 아무도 없다. 전쟁의 승자도 없다. 폐허가 된 마을과 찢겨진 민중의 갈라진 조각들만 남겨질 뿐이다. 민중도 흩어지고 부패와 타락만이 공존한다. 그루셰와 시몬의 사랑도 갈라지면서 전쟁의 파편들은 확장된다. 시몬이 그루셰에게 건넨 ‘십자가 목걸이’만이 전쟁의 역사성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현대적 국악 리듬으로 부르는 “나 널 기다릴 거야 시몬. 날 기다려줘 그루셰. 빗발치는 총탄들, 땅위로 쏟아지는 핏빛의 빗물, 높이 쌓인 시체산” 의 노랫말이 담긴 가사가 뱉어지는 소리의 리듬은 판소리 특유의 탁음으로 울려대면서 내면의 감정을 응집시킨다. 인물 내면의 감정의 소리음을 판소리 화 시켜내는 맛은 묘한 감정을 흔들어댄다. 반란군 흉갑기병에 의해 죽어가는 죽음(영주)의 장면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죽어가는 과정이 진지하지 않고 재밌다. 연출은 장면에 웃음 코드를 넣으면서도 전쟁으로 인한 역사성에 인간 생명의 선을 길게 담아낸다. 배우들의 대사는 걸쭉한 사투리로 툭툭 뱉어지고, 장면사이는 웃음으로 끼어들기를 한다.
정의신 연출은 영주의 죽음에도 옷에만 집중하는 영주의 아내 ‘나텔라아바슈빌리’를 자본의 탐욕, 부패한 권력으로 상징화 시키면서 만화적인 이미지로 중첩시킨다. 요리사들의 극중극 장면과, 하녀들이 영주의 값비싼 생활소품( 드레스, 모피코트, 진주 등) 옷을 펼쳐 놓는 장면에서는 등장인물을 과장되게 외형화 시키고 연극적인 놀이로 코믹성을 확대한다. 개그프로그램 한 장면을 보는 듯 연출은 극중 장면을 색칠한다. 툭툭 튀는 배우들의 언어이지만, 브레히트의 극적 구조와 맞물리면서 관객과 벌어질 수 있는 사이를 웃음코드로 채워 넣고 가벼운 시선으로 객관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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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죽음과 부인의 도망은 무기력한 국가권력으로 상징화 되고, 그 무기력의 탐욕을 얻으려는 것은 전쟁의 이어짐이다. 승자, 패자도 없는 전쟁의 무질서만 존재한다. 민중들의 삶만 갈라지고 쪼개지면서 황폐화 된다. 전쟁의 폐허는 더 부패하고 지키는 자는 없다. 민중은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무질서가 난무하고 개인화, 물질탐욕, 소유의 집착만이 공존한다. 이러한 시선들은 그루셰가 품고 있는 아이(미헬)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가능성의 온기 느끼기가 시작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한 선수를 응원하듯, 그루셰가 아이를 향한 모성애적 감정의 성장성에 시선은 따라간다. 전쟁으로 인한 찢겨진 감정의 폐쇄성 들은 개인화 되고, 흩어지고 쪼개진다. 전쟁으로 무질서한 삶에서 생명을 지켜내는 것은 그루셰다. 지켜냄의 온기는 희망의 상징이 된다.
오토바이를 타고 객석을 누비며 상금 1000피아타를 외치며, 영주의 아들을 찾아 무대를 뒤지는 반란군들은 오히려 무섭지 않다. 누카 성의 영주와 그의 부인처럼 다르지 않다. 연출은 이 전쟁의 순환성을 유쾌하게 그려내면서 전쟁의 역사성과 현재성의 고리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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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셰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은 푸근하게 다가온다. 그루셰가 늙은 농부에게 비싼 값을 치르면서 우유를 사는 장면에는 전쟁의 폐허가 역사의 판화처럼 공존한다. 늙은 농부는 “ 다음번에 우유가 필요할 땐 군인을 때려 죽여.” 한다. 전쟁은 삶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 악연의 고리다. 연출은 그루셰와 늙은 농부와 주고받는 대사를 연극적 일상 언어로 대체하기를 함으로써 장면몰입에 판 깨기를 시도한다. 낯선 풍경이다. 어색 할 수 있는 장면변화의 사이를 준다.
이어, 농부와 그의 아내도 아이(미헬)을 지켜내지 못한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죽음의 연속이고, 갈라진 민중의 마음만이 존재된다. 죽음이 커지고, 민중들의 마음이 찢기고 갈라질수록 그루셰와 미헬의 모성애적 사랑은 커져만 간다. 정의신 연출은 이 장면에서 판소리 고유의 냄새를 자극하기 위해 걸쭉한 사투리를 일상대사로 차용하고, 농부의 죽음 장면도 유쾌하게 그려낸다.
크루셰는 쫓길수록 모성애는 커져가고 마음은 동일화 된다. 버려야 할 아이에서 지켜내야 할 아이로 향해 가는 성장과정이 흥미롭다. 그루셰만이 모든 전쟁의 역사를 구원하고 치유해 줄 것 같은 태도다. 그것은 희생과 헌신의 진정성이 묶여졌을 때 가능하다.
○ 아츠닥의 재판과 이념의 대립을 평화로 대체하기
22일간 아이를 안고 떠돈 그루셰의 모성애는 동쪽마을로 연결되는 얼어붙은 허름한 밧줄다리에 다다르면서 연출의 설정(극적분위기)과 무대형상화의 계산은 절정에 이른다. 용기를 낼 수 없는 허름한 다리,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낡고 허름한 다리에서 정의신 연출은 그 누추하고 허름한 죽음의 공간에 다리를 분단으로 상징화시킨다. 대립의 이념, 민중의 갈등과 아픔을 다리 놓기를 통해 하나로 연결한다. 자유의 통로다. 그 통로 끝에 멈추어선 그루셰를 통해 극적 분위기의 절정을 설정한다. 무대천장은 하얀 눈을 쏟아내고 잎갈 나무를 에워싼다. 그루셰는 눈을 바라보며 “ 미헬, 겨울에 잎갈 나무가 말라 죽지 않도록 감싸주는 거란다” 냉전의 역사, 잔혹한 전쟁에서 찢어지고 갈라진 것에 대한 치유이자 평화의 온기다.
정의신 연출은 2막 1장 아츠닥의 재판관 이야기를 극중극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전쟁의 현재성에도 타락하는 민중들의 현실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비판의 속도를 높인다. 전쟁을 통해 얻어 질수 있는 것은 소멸의 소유와 타락한 부패다. 전쟁이 멈출 때까지 극에 달한다. 민중과 농민들은 더 빈곤해지고 물질과 탐욕이 넘친다. 부패와 탐욕이 우굴 거린다. 이 역사의 현재성에서 중심을 잡는 것은 재판관 아츠닥이다. 넘치는 자본주의를 경계하고 소유한 물질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전쟁의 당위성은 붕괴된다. 아츠닥은 신을 연결함으로써 세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재판은 숨을 쉬고 살아가려는 농민들과 진정자 들의 승리다.
정의신 연출은 낡은 다리에서 재판장면까지 연결하면서 극의 몰입을 경계하고, 특유의 시선과 해학으로 판소리를 인물의 감정을 묶고 창극의 극적 구성으로 극을 풀어내면서 브레히트의 본질적인 서사극 구조의 느슨함을 그 만의 연극적 문법으로 채워 넣는다. 그루셰의 오빠(라브렌티)를 1,2등장인물로 동일화 시키면서 특유의 재밌는 연극적 발상으로 장면을 희극적으로 묶어버린다. 갑자기 튀어나온 인물들의 과함의 무거움이 잘못 삽입되면 극의 균형이 깨지고 치우칠 수 있는데도 적절하게 희극의 삽화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
유숩과 그루셰의 계약결혼으로 설정된 죽음의 공간에서 상여꾼들을 등장시키고 결혼식 장면을 공간에 하나로 묶어내면서 장면을 밀도 있게 움직여 낸다. 상여소리는 브레히트의 원작,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판소리와 창극의 재료들을 모아 현대판 창극으로 절묘한 앙상블을 그려낸다. 전쟁의 종전으로 살아남은 유숩과 그루셰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숩은 가려움증을 호소한다. 가려움은 전쟁의 유전이다. 마치, 원폭의 피해들을 등장인물 유숩으로 옮겨놓는다. 전쟁으로 남은 것은 영혼의 상처이고, 피해 상처는 유전이 된다. 정의신 연출은 이 장면에서 유숩의 삶의 강한 애착과 몸부림들을 풍자적으로 남성화를 더욱 자극시킴으로써 삶의 욕망적 끈으로 풀어낸다. 미워 할 수 없는 유숩의 인물화에 연민의 해학을 설정한다.
미헬의 성장과정을 동네 아이들 일상 놀이로 극에 삽입함으로써 감정의 몰입에 대한 거리조절 하기로 균형을 잡는다. 아이들의 모습을 중년의 배우들로 대처함으로써 웃음의 코드를 극대화 시킨다.
○ 정의신 연출의 동그라미의 확장성
전쟁에 유연히 기른 미헬을 향한 아츠닥의 모성애는 마지막 누카의 법정에서 빛을 발한다. 누카 성의 영주의 부인( 나텔라 아바슈빌리리)은 친모로써 미헬로 요구하지만, 진정한 모성애는 발견되지 않는다. 전쟁을 끝나도 소멸될 수 없는 물질화, 물질적 욕망들이 내면에 꿈틀되고 득실거린다. 인물의 상징성의 추악함과 그루셰의 모성애적 진정성은 결론 낼 수 없다. 두 마음의 묶음을 백묵 원으로 그려진 둥근 원안에서 친권논쟁의 싸움판이 시작된다. 정의신 연출은 현대 황혼이혼의 문제를 재판장면에서 유쾌하게 툭툭 던지고 그려내면서 적절한 희극성 가미한다.
백묵으로 그려진 원은 전쟁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들어낸다. 전쟁의 현존성은 원으로 함축되고 상징화 된다. 원은 전쟁을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공간이다. 관객은 이 공간에 현재의 시선으로 원을 강하게 바라보고, 내면은 재판관의 내면과 동일시된다. 재판은 아츠닥의 판결로 그루셰의 모성애로 손을 들어주고 재판을 끝내지만 뒷맛은 개운하지 않다. 이어지는 전쟁의 소리. 이 개운하지 않는 전쟁의 뒷맛의 씁쓸함을 연출은 백묵원의 원을 연출 적으로 확대하고 확장한다. 전쟁의 이어짐을 대형 원 그리기를 시도하고 확장하면서 온몸을 다해 막아선다.
정의신 연출은 제일교포 2세다. 일본에서 성장한 연출에게 ‘동그라미’는 성장에 있어 채워지지 못한 결핍의 시선이고, 끈질기게 풀어내야 할 집념으로 비추어진다. 이 정체성의 혼돈성은 원으로 하나가 되어야 풀어질 수 있다. 연출은 무대 바닥으로 그려지고 표면으로 올려지는 원안에 닫쳐있던 마음을 던지고 치료를 시도한다. 성장과정에서 한국인 아버지를 지켜보고 분단의 역사성을 객관적으로 바라봤던 연출로써는 조국, 민족, 분단, 삶에 소외성과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평화로 묶여지는 듯하다. 온전하게 그려져야 할 동그라미는 내면 밖으로 강하게 던져지고 전쟁의 현실성과 중첩된다. 그의 강렬한 평화의 욕망은 무섭도록 돌진하는 원으로 그려지고, 관객의 마음으로 옮겨 넣기를 한다.
평화의 메시지로 상징되는 원 그리기가 극적 장면의 연결성에서 다소 혼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연출 특유의 연극 만들기의 천재성, 판소리와 창극이라는 훌륭한 재료,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구성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연출 의도를 융합했다. 국립창극단 배우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브레히트의 ‘코카서의 백묵원’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
판소리로 인물의 감정을 쏟아내고 마당의 놀이성 으로 흥을 돋우고, 국악의 리듬과 박자로 브레히트의 극을 밀도 있게 좁혀낸 배우들도 창극단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정의신 연출의 연극 래시피 들이 창극과 융합되면서 묘한 참기름 냄새를 극장에 진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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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단 배우들과 연출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과하게 보일 수 있는 인물캐릭터의 설정, 치우칠 수 있는 웃음코드, 반전적 인물의 일상화, 뮤지컬적 요소와 판소리의 묶음성 등으로 극을 현대판 창극으로 조립할 때 연출의 다른 작품에서는 재료들의 쓰임새가 달라진 연극적인 배치를 기대한다.
○김건표 교수(대경대학 연극영화과 학과장)는 연극과 공연예술분야 평론 및 인터뷰 전문가다. 연극·뮤지컬·공연 예술문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 방송과 다양한 매체의 신문을 통해 공연예술가들의 인터뷰와 작품리뷰를 써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