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4일 제재심의위원회를 열어 자살보험금을 미지급했다는 이유로 ING생명을 징계했다. 자살한 보험가입자에게 약관에서 약속한 재해사망보험금 대신 그보다 금액이 적은 일반사망보험금을 줬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ING생명은 500억원대의 보험금을 추가 지급해야 한다. 일반사망보험금을 지급한 다른 생명보험사도 2000억~5000억원으로 추정되는 보험금을 더 줘야 하는 상황이다. 제재심은 보험계약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약관에 정한 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게 타당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생보사들은 제재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불사할 태세다.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재해로 볼 수 없다’는 점이 명확한데도, 약관상의 표기 실수를 빌미로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주장이다. 또 이번 결정으로 자살을 조장하는 반사회적인 악영향이 우려된다며 제재심의위원회의 징계 결정을 비판하고 있다.

찬성 약관 실수라도 책임전가 안돼…금융소비자 보호가 우선돼야

특약에 지급규정 명시…약관 적용 받아야


자살보험금 미지급 논란의 쟁점은 자살 면책기간인 2년이 지난 후에 자살한 경우 재해사망특약에 따른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가 여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해사망특약에 명시적으로 ‘자살 면책기간이 지난 후 사망한 경우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한 재해사망금 수준의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

보험업계는 자살은 재해가 아니기 때문에 재해사망특약에 자살이 포함돼 있다 하더라도 재해사망보험금 수준으로 지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약관상 ‘고의적 자해’의 경우 재해 분류에서 제외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돼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쟁점은 ‘자살을 재해로 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보험사와 고객이 보험계약 당시 맺은 합의와 정해진 약관이 무엇이었느냐가 핵심이다. 쟁점은 그 당사자 간의 합의 내용에 따라 또 약관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가로 봐야 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보험계약은 종신보험 주계약과 재해사망특약 모두에 ‘자살의 경우에도 2년이 경과한 후에는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자살면책제한규정이 들어가 있다. 계약 후 2년이 지나 자살한 경우엔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것으로, 당연히 해당 계약 및 특약 등의 약관을 적용받아야 한다.

자살면책제한규정이 약관상 명시적으로 규정돼 있다는 것은 보험사와 계약자 간에 재해보험사망에 준하는 보험금 지급이 계약내용에 포함돼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 간 합의가 이뤄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살이 통상적인 개념상 또는 약관에 의해 재해가 아니라고 분류돼 있다고 해도 계약과 약관 해석의 원칙상 약정된 보험금은 당연히 지급해야 한다는 얘기다.
당사자 간 합의나 약관의 효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그 합의가 사회질서에 반할 때뿐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그렇지 않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도 있다. 대법원 2006다55005호 판결 사례다. 이 판결에서 문제가 된 보험계약은 주계약이 교통재해사망 보장으로 돼 있고 재해사망특약에 함께 가입된 경우였다. 주계약에만 자살면책제한 규정이 있고 재해사망특약에는 주계약에 대한 준용 규정만 있을 뿐 별도의 자살면책제한규정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자살이 재해가 아니더라도 자살면책제한규정에 의해 보험금 지급 사유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사자 간 별도 합의로서 의미가 있는 경우 이는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에도 부합하므로 재해사망보험금 수준의 지급이 타당하다고 봤다.

보험사들은 자살면책제한 조항을 기재한 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주장한다. 백번 양보해 보험사의 실수라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금융소비자에게 전적으로 전가할 수 없다. 약관을 성실히 준수하는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보험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게 맞다.

보험사들은 재해사망특약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하는 경우 자살을 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수십만건의 자살 관련 보험상품을 판매할 당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지, 보험금 지급단계에서 뒤늦게 강조할 내용은 아닌 듯싶다. 더구나 2010년부터 문제가 된 약관은 이미 개선(일반사망보험금 지급)됐을 뿐만 아니라 실제 보험금지급과 자살증가율은 통계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이 같은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그동안 보험사들이 자의적 해석에 따라 고객에게 보험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온 관행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반대 법원선 ‘자살은 재해 아니다’…보험원리에 맞는지 따져봐야

고액 보험금 지급땐 자살 부추길 수도


보험은 우연한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그 손해를 보상하는 제도다. 동일한 위험에 노출돼 있는 사회구성원들은 보험을 통해 구조적인 안전망을 제공받는다. 보험이 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인정받기 위해선 단체성의 원리, 대수의 법칙, 수지상등의 원칙 등을 충족해야 한다. 보험사고나 분쟁 시 관련 법률 적용이나 해석에도 이런 원칙들이 견지돼야 한다.

자살 시 일반사망보험금에 더해 재해사망보험금까지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재해사망보험금은 일반사망보험금의 2~5배에 달한다. 생명보험 가입자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자살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다. 보건복지부의 ‘2014년 자살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자살시도자 1359명 중 10.1%인 136명은 경제적 이유가 계기가 됐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 볼 때 재해사망보험금을 추가로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경제적 어려움을 오래 겪은 사람일수록 자살에 대한 유혹이 커진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에서 보듯이 보험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부조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보험이 그런 긍정적인 기능 대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목적과 취지에 반해 사회적 안정성과 건강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고의에 의한 자살은 재해보장특약이 정한 보험사고, 즉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재해보장특약은 추가로 보험료를 납입하고 체결하는 부가계약이다. 사망원인을 묻지 않고 피보험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주계약과는 달리 우발적인 사고인 ‘재해’로 인한 사망만을 담보한다. 고의에 의한 자살은 당초부터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고의에 의한 자살은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은 법원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사고에 의한 사망을 보장하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자살한 경우까지 추가 지급하는 것은 보험원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이슈로 떠오른 재해보장 특약 약관은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대법원은 각 유형에 따라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여부를 달리 판단하고 있다. 일부 유형의 경우 아직 이에 대한 법원 판결이 없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대법원이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책임을 인정한 판례와 비슷한 유형의 약관 케이스에 대해 재해사망보험금 ‘전액 지급’을 선고한 1심 판결을 배척하고 최근 ‘일부 지급’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고의에 의한 자살에 대해 고액의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보험원리나 법질서가 보호하려는 기본가치에 합당한지를 깊이 고민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원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은 현시점에서 고의 자살에 대한 재해사망 보험금의 지급 여부를 일률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법원의 입장이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자살이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돼 국가 차원의 종합예방대책이 실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당국의 이번 결정은 행여 보험가입자들의 오판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개연성도 있다.

약관을 단편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무엇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보험소비자를 보호하는 길인지에 대한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금융당국의 이번 제재 결정은 생명보험사들이 약관을 부주의하게 사용한 데 대해 행정조치를 내린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재해사망보험금 지급 여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영역까지 침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