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식 화백의 1884년작 ‘Work 84-S’.
곽인식 화백의 1884년작 ‘Work 84-S’.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직후 일본 화단에는 형태를 극도로 단순하게 표현하는 서구의 ‘미니멀 아트’를 동양적으로 재해석한 전위미술 장르 ‘모노하(物派)’가 등장했다. 미니멀 아트가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작업하는 ‘결과의 예술’이라면, 모노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을 통해 사물과 공간, 위치, 상황, 관계 등에 접근하는 예술이다.

구체적으로는 돌, 철, 나무 등 재료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든가 그림의 원재료인 점, 선, 면에 주목하는 식이다. 일본에서 활동한 고(故) 곽인식 화백(1919~1988)은 이 같은 모노하 운동을 주도하며 1960~1970년대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모노하의 선구적 작가인 곽 화백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물질과 빛의 파노라마’ 전이 오는 3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에서 열린다. 1919년 대구에서 태어난 곽 화백은 10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물질과 현상’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담은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유리를 의도적으로 깨 표면의 망을 형성하는 등 1960년대까지 전위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현대미술을 선보였다. 나무와 쇠, 유리 등의 물성에 대한 관심을 화면과 형상에 반영하는 작업은 이우환 등 당대 젊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줬다.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제작된 회화 20여점이 나왔다. 작가의 말년에 제작돼 완숙미가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종이에 일정한 크기의 쌀알 모양 색점 또는 묵점을 마치 낙엽이 쌓이듯 끊임없이 쌓아올리면서 한지의 물성에 대한 탐구를 한 것이 특징. 먹을 사용한 검은색 또는 보라, 노랑, 푸른빛의 단색 터치로 찍어간 붓 자국이 아롱져 독특한 공간과 빛의 세계를 연출한다. 규모는 크지 않아도 미술사적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의 존재를 일깨우는 뜻깊은 자리다.

조정열 갤러리현대 대표는 “일본 현대미술의 큰 줄기를 이룬 모노하 운동에서 선구적 존재로 손꼽힌 곽 화백은 상업적이지 않은 작가라는 이유로 거의 잊힌 존재가 됐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전시를 통해 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예술적 위상도 재조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바로 옆 갤러리현대 신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서 열리는 한국 단색화(모노크롬)의 대표주자 정상화 화백의 개인전과 함께 감상하면 최근 국내외에서 불고 있는 ‘모노크롬 열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하다. (02)2287-3591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