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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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봉사에 바치는 가톨릭 신부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분들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까?’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노숙인센터에서 김하종 신부(57)를 만나 궁금증이 풀렸다.

“왜 결혼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당연히 있었어요. 요새도 결혼식에 가서 예쁜 신부를 보면 설레고 결혼하고 싶어요. 남녀 간의 사랑은 참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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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게 웃던 김 신부가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부부들, 다른 이성에게 마음 뺏길 때 있겠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충실하게 사제의 길을 가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참 쉽지 않아요. 사실이에요.”

기대 못했던 인간적인 대답을 해 준 김 신부, 이름은 ‘하느님의 종’ 앞글자를 따 지었다고 했다. 이탈리아 본명은 보르도 빈첸초(Bordo Vincenzo). 1990년 한국에 온 이후 줄곧 성남 지역에서 소외된 이웃들의 천사로 살아온 김 신부는 최근 24회 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를 언급하자 사모하는 여인을 떠올리듯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분이세요. 대단하세요. (저하고는) 비교 안 돼요.”


25년 동안 성남에서

김 신부의 삶은 단순하다. 월~토요일은 안나의집에서 생활하고, 일요일에는 각지 성당을 다니며 후원자를 유치한다. 안나의집에서는 점심식사 후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매일 찾는 550여명 노숙인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안나의집에서 노숙인분들이 식사하고 샤워해요. 타월, 비누를 드려요. 옷 입고 이발도 해요. 인간의 가장 급한 걸 해결할 수 있어요. 밥 먹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새출발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저녁식사 후에는 주변 4개 빌라(푸른청소년쉼터, 중장기청소년쉼터, 공동생활가정, 자립관)를 돌며 거주 중인 청소년들을 어루만진다. 4곳은 모두 김 신부가 국내 및 이탈리아 지인들로부터 후원받아 지었다. 그는 가출청소년, 유기아동, 고아 등을 처음에는 푸른청소년쉼터에서 생활하게 하고 중장기쉼터, 공동생활가정, 자립관 순서로 거치며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생활이 너무 편해지면 오히려 재활 의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김 신부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에요. 노숙인은 아픈 사람들이에요. 왜 길에서 자, 일 안 해, 기술 없는지, 공부 안 했는지, 왜 가난했는지 상담하다 보면 부친은 알코올 중독이었고, 부모가 이혼했고, 새엄마에게 학대받아 가출했고… 이런 얘기들을 들어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교육과 사랑을 제대로 못 받아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문

가 오래 쌓인 환자들이에요. 여기 와서 새 생활을 찾고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보라는 거예요.”

한국에 온 것은 우연이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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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부는 로마 인근 작고 조용한 마을인 피안사노에서 태어났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돌아가는 한국 생활과 정반대인 이 평화로운 마을이 가끔 그립다고 했다. 그는 휴대폰에 가득 저장돼 있는 고향 사진을 하나씩 보여줬다. 그는 농사일을 하던 부친 밑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겪은 난독증은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 동생들은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조카 사진을 보는 게 그의 소박한 낙이다.

김 신부가 한국을 알게 된 것은 일제 치하 한국을 ‘동방의 등불’로 표현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집을 누군가로부터 받아 읽고나서다. 타고르에 빠진 뒤 간디를 알게 됐고, 그 이후 힌두교, 불교, 유교를 모두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극동(far east) 지역에 관심이 커졌다고 했다. “옛날 동양문화는 깊이 생각하는 게 총체적으로 매력이 있어요. 자비, 자연을 지키는 것 등….”

사제 서품을 받은 1987년을 전후해 이탈리아와 세네갈 등에서 선교 및 봉사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90년 한국오블라띠 수도원에 부임하면서 한국에 첫발을 들였다. 오블라띠 수도원의 사명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그런데 ‘왜 유독 한국’이었을까. 이 역시 예상 못한 대답이 나왔다. 그는 “일본엔 큰 관심이 없었고, 중국은 가고 싶어도 들어가서 활동이 어려운 공산국가였어요. 결국 한국밖에 갈 곳이 없었어요”라고 웃었다.

주변 천사들의 도움에 감사

오블라띠 수도원에서 활동 지역을 찾던 그는 성남 지역에 빈민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1991년 성남 신흥동 성당으로 향했다. 몇 년간은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오후 무료급식 활동을 했고, 저녁에는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영어 수학 등을 가르쳤다. 그러다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노숙인들이 급증하자 1998년 7월 노숙인센터를 세워 노숙인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다. 안나의집은 노숙인센터 건립자금을 쾌척한 독지가 A사장의 뜻에 따라 지어졌다. 식당 사업가이자 천주교 신자로서 김 신부의 활동에 감사해하던 A사장은 돌아가신 어머니 세례명 ‘안나’를 기려 달라고 부탁했다. 김 신부는 “주변 천사들의 도움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사랑이 아니다

여성과 결혼 대신 예수님과 결혼을 택했다는 그에게 사랑에 대해 물었다. “예수님 사랑을 참 많이 느껴 행복했어요. 이 행복을 다른,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알리고 나누는 게 제 역할입니다.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겠지요?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겠지만 그 소중한 인연 자체를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사랑이 아니죠.”

그의 유일한 취미는 자전거를 타고 양평 호반 등까지 100㎞ 내외 거리를 오가는 일이다. “제 생활, 정말 인간적으로 재미없어요. 그러나 재미있는 생활을 해서 행복한 게 아니고, 사람들을 사랑해서 전 행복해요.”

사람들 자립할 때가 가장 큰 보람

김 신부는 최근 가장 기뻤던 일이라며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어떤 여인의 사진을 보여줬다. “엄마 돌아가신 다음 아빠가 도망가고, 혼자 여동생을 키운 친구예요. 꼬마일 때 신흥동 성당에서 만났는데… 딸 같아요. 영적인 아버지로서 계속 알고 지냈어요. 그날 결혼시켰을 때 너무 기뻤어요.” 얼마 전에는 안나의집에서 2년간 머물던 두 명이 다 취직에 성공해 후원금 봉투와 와인을 갖고 와 김 신부에게 “아버지, 다시 설 수 있게 해 주심에…”라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와인 얘기가 나온 김에 술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 정말 비싸고 좋은 술을 갖고 왔어요. 그런데 여기(안나의집) 선생님들 ‘원샷’ 하는데…(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웃음 섞인 비명을 지르며) 선생님 아니~그러면 안 돼요, 간 죽어요, 아주아주 나빠요~.”

2년에 한 번 4주간 고향을 찾아 가족을 만나고 이탈리아 현지 후원자를 모은다는 김 신부에게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말 없이 장기기증 및 시신기증 등록증을 보여줬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게 죽음이죠. 제 몸에 있는 것, 의대생들 연습하고, 필요한 한국 사람들에게 가서 새 삶을 살게 했으면 좋겠어요.”

'나의 집' 기업들 후원 많아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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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집 운영에 가장 큰 힘을 주는 것은 기업들의 후원이다. 김하종 신부는 “기업들이 들어오면 제일 좋아요. 너무너무 기뻐요”라고 말했다. 올 1월부터 현재까지 삼성테크윈, 파리크라상, 한림제약, 해태제과 등 30여개 기업이 수차례에 걸쳐 수만~수백만원을 보내왔다. 그러나 매월 적자를 피할 수 없다는 게 김 신부의 설명이다.

안나의집에서는 매일 노숙인 대상 특화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월요일에는 법무사의 법률상담, 화요일에는 이발봉사와 무료진료서비스, 수요일에는 피복지급 및 알코올 중독 교육, 목요일에는 이발봉사와 취업상담, 금요일에는 인문학 교육이다.

인문학 교육은 우울증 극복, 행복전략 등 다양한 주제로 성남시 정신보건센터 등에서 온 외부 강사가 강의한다. 이런 프로그램 운영비는 100% 후원으로 충당한다.

안나의집 맞은편 조그만 공장에서는 한때 노숙인이었던 10여명이 일하면서 쇼핑백을 만든다. 이 공장 운영으로 벌어들인 돈은 모두 이들에게 지급한다. 한 사람당 월 50만원 정도다. 안나의집 운영이 더 빠듯한 이유다.

현재 이탈리아 현지 후원인 1000여명이 김 신부를 돕고 있다. 푸른청소년쉼터, 공동생활가정으로 쓰는 빌라는 이탈리아 후원인 돈으로 마련했다. 다행히 1991년 봉사를 시작할 때 2(한국) 대 8(이탈리아) 정도였던 후원금 비율이 현재는 반대가 될 정도로 국내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김 신부는 말했다.

는 난독증을 겪는 장애인입니다. 네, 정말입니다. 저, 낱말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도 텍스트의 전체적인 뜻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입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든 생각은 내가 정신적으로 뒤처지는 바보이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웠고 그 속에서 저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으로 전 단단해졌고, 영을 섬세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전 수도 없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똑같이 아름답지만, 덜 힘든 사제직을 고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노숙자들, 장애인들, 교도소 재소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살아야 하나. 왜, 왜 그럴까…?

아마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볼 때 다른 이야기가 필요 없이 그 고통을 제 영이 먼저 인식합니다. 저도 같은 아픔과 소외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그 고통은 저의 것입니다. -김하종 신부가 이탈리아 후원자 및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