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화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정기화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2009년 10월4일, 그리스에 조기 총선이 실시돼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스 새 정부는 며칠 뒤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유럽연합(EU) 경제·재무장관회의에서 그리스의 재정적자가 당초 발표한 국내총생산(GDP)의 3.7% 수준보다 훨씬 많은 12.7%라고 발표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수가 줄어든 데다 총선을 앞두고 재정 지출이 늘어났고 이전 정부가 심각한 재정적자를 은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리스 국가신용등급은 곧바로 떨어졌다. 처음엔 이것이 그리스만의 문제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위기는 확산됐다. 공적연금과 임금을 줄이려는 그리스 정부의 개혁은 노조 등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투자자 신뢰를 잃었다. 유로존 정부 간 갈등으로 구제금융까지 지연되면서 그리스 국채 이자율은 상승했고 투자자들은 국채 상환불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 부채가 많은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의 국채 이자율도 급등했다.

국채 상환불능 우려는 이들 국가의 국채를 보유한 유로존 은행에 대한 신용 우려로 퍼져나갔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을 포함한 유로존 전체의 위기로 번지게 된 것이다.

미국 의회조사처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재정위기의 근본 요인은 일부 유로존 국가들의 민간 및 정부 부채의 증가와 이를 가능케 한 국제금융환경이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도 국채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

이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건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투자를 통해 경제가 성장하면 조세수입이 늘어나고 그래서 국채 이자 지급은 가능해진다. 경제 성장으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 정부부채의 GDP 비중도 낮아진다. SOC 투자로 소득이 증가하면 이에 따른 이익은 미래 세대가 본다. 따라서 미래 세대가 부채의 이자 부담을 지는 건 합리적이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는 기업 채권과 마찬가지로 레버지리 효과를 통해 재정 여유자금의 수십 배를 발행할 수 있다. 가령 GDP 1%만큼의 재정 여유자금이 있고 국채 이자율이 2%라면 GDP 50% 규모의 국채발행이 가능하다. GDP 50% 규모의 국채 이자는 GDP 1%로 지급할 수 있어서다. 물론 만기가 돌아오면 국채를 상환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GDP 50% 규모의 여유자금을 마련할 필요는 없다. 신규로 국채를 발행해 원금을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자 지급이 잘 이뤄질 것이라는 시장의 신뢰가 유지되는 한 신규 국채발행은 어렵지 않다.

정부의 재정 규모를 크게 넘어서는 수준의 국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첫째, 이자 지급이 가능하도록 세금이 순조롭게 걷혀야 한다. 국채를 통해 조달된 자금이 복지 등에 지출돼 미래 조세수입을 증가시키지 못하면 국채 상환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다. 둘째, 국채이자율이 안정돼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투자자들에게 상환능력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조세수입이 늘지 않았는데 이자율이 올라가거나, 국채가 증가하고 있는데 조세수입이 늘지 않으면 시장은 상환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국채 신규 발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몰릴 경우 이른바 국가부도에 빠지는 것이다.

정부 채무는 민간기업과 달리 마땅한 통제 수단이 없다는 게 딜레마다. 그런 이유로 유럽은 유로경제통합에 들어가면서 개별 국가 정부의 부채 규모를 제한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1992년에 체결된 안정성장협약을 통해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규모를 GDP의 3%와 60% 이하로 제한하는 재정규율을 만들었다. 그러나 2005년 9월 발행된 유로머니에 따르면 유로존 각 정부의 재정통계는 부실 덩어리였다. 민간 기업이라면 불가능했을 다양한 방법으로 분식회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는 2003년 국방비 지출을 누락시키고 사회보장 잉여금을 과다 계상하는 방식으로 GDP의 7%에 해당하는 부채를 숨겼다. 정부투자기관을 통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거나 자산담보증권을 발행해 재정수입을 늘리기도 했다. 당시 공식 정부부채에 잡히지 않았다.

적지 않은 국가가 그리스와 같은 방법으로 국가부채를 늘려왔다. 그러던 차에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지자 이자율이 급등했다. 지급부담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서 재정수입은 감소했다.

이런 상태에서 불거진 그리스 정부의 부채통계 분식은 ‘국채 불신’의 촉발제가 됐다. 부채가 많은 국가들은 신규 국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게 됐고 국채상환 불능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위기를 맞은 국가들은 국유 자산 매각을 통해 부채 상환에 나섰으나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유럽중앙은행이 정부채권을 매입하고 나서야 국채 신규발행이 가능해졌다. 이는 유럽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각국 정부의 채권을 매입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유로화 가치 하락을 가져왔고 유로존 다른 국가들의 실질 구매력까지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 경제의 성장 추세나 신용 정도를 고려하면 국가부채로 인한 유럽의 재정위기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복지비 증가는 정부의 세수 증가율을 크게 넘어서고 있다. 각종 연금을 비롯해 정부 부담 채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의 재정통계에서 지방정부, 일부 공기업, 일부 기금 등이 제외돼 있어 정부의 부채통계가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의 국가부채 참조)

많은 외국인 투자가들이 한국 국채에 투자해 놓고 있으며 글로벌 금융기관들도 상당량의 한국 국채를 펀드에 담아두고 있다. 이는 한국 국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국채 가격 하락과 이로 인한 경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국채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마련돼야 한다. 정부는 민간기업 회계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분식회계가 발견되면 경영자를 형사 처벌하지만 정부의 재정통계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도 없는 게 현실이다. 재정건전성을 위해 지금이라도 국채관리를 위한 엄격한 재정준칙이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 투자자들의 신뢰를 유지하고 유럽 재정위기를 먼 나라 이야기로 남겨둘 수 있게 된다.

정기화 <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