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노는 로마의 유력 인사들에게 미술 작품을 공급하는 내로라하는 화상이었다. 그는 어느 날 카라바조(1571~1610)라는 신출내기 화가의 작품을 들고 델 몬테 추기경을 방문했다. 카라바조는 부랑자처럼 떠도는 청년 화가였지만 재능하나만큼은 미켈란젤로 뺨칠 정도로 뛰어났다. 그래서 발렌티노는 그의 작품이야말로 늘 새로운 것을 찾는 헤매는 추기경의 구미를 당기게 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림들을 보자마자 델 몬테 추기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를 흥분하게 만든 것은 ‘과일 파는 소년’이라는 작품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의 미소년이 뭔가를 갈망하는 눈초리로 감상자를 응시하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둔감한 사람이라도 노골적인 성적 암시가 담겼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작품을 그린 카라바조는 천하의 불한당이었다. 밀라노 부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페스트로 가족을 잃고 고아가 돼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부랑자들 틈에 뒤섞여 눈칫밥을 먹은 그는 자신을 버린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갔다. 다만 예술적 재능만큼은 타고나 시모네 페테르차노라는 화가가 그를 거둬줬다. 몇 년 뒤 그는 무일푼으로 로마로 흘러들어갔다. 그곳에서 삼류 화가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제법 솜씨가 괜찮아 발렌티노의 눈에 띈 것이다.

델 몬테 추기경을 매료시킨 ‘과일 파는 소년’은 카라바조가 동성애를 의식하고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린 것이었다. 내면에 잠자고 있던 동성애적 성향이 그로 하여금 그런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었다. 델 몬테 추기경은 교황청의 실력자로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그에게 ‘과일 파는 소년’은 그야말로 구미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그는 카라바조를 아예 자신의 집에 들어앉힌 후 미소년들로 득시글대는 그림들을 그리게 했다. 델 몬테 추기경의 집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카라바조는 동성애적 기질이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림 솜씨가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여기저기서 작품 제작 의뢰를 받게 된다. 거리의 노동자를 예수의 모델로, 부랑자를 성자로 묘사한 그의 그림은 기독교단의 거센 반발을 부르기도 했지만 인물을 극적인 명암대비 속에 표현, 드라마틱한 효과를 자아내는 데는 저마다 혀를 내둘렀다. 추기경에게서 독립한 그는 세코라는 소년을 조수로 고용, 낮에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투전판과 선술집을 떠돌았다. 그는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이 고용한 남자 모델이 주된 상대였고 조수인 세코도 그의 파트너가 됐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1606년 인생 최대의 시련이 닥친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1604년에도 교황 경찰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탈출했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살해된 자는 로마의 유명한 뚜쟁이 라눈치오 토마소니였다. 미술사학자들은 오랫동안 그의 살해 동기를 테니스 경기에서 빚어진 말다툼 때문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2002년 영국의 미술사학자 앤드루 그레이엄 딕슨은 교황청에 보관된 자료를 뒤지다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다. 놀랍게도 토마소니의 사인은 성기 거세에 따른 과다 출혈이었다. 카라바조가 토마소니의 성기를 거세하려 했다는 것은 이 사건이 한 여인을 두고 벌어진 치정 사건임을 의미한다. 당시 로마에서는 자신의 여인에게 모욕을 가한 남자에게 이런 방식으로 복수하는 게 하나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당시 카라바조는 토마소니와 함께 필리데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들 사이의 삼각관계가 이 끔찍한 살해 동기가 된 듯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동성애자라고 여겨졌던 카라바조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사건 직후 그는 변장을 하고 로마를 빠져나가 콜로나 공의 영지로 도주했다가 나폴리를 거쳐 몰타 섬으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성화를 그려 공을 인정받은 그는 기사단의 일원이 돼 사면의 희망을 갖지만 다시 말썽을 일으켜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그는 가까스로 탈출해 시칠리아 섬을 거쳐 나폴리로 도주하지만 그곳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후 다시 로마 부근의 포르토 에르콜레 항으로 옮긴다. 그는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해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교황의 사면령이 내려진 지 겨우 며칠 지난 뒤였다.

그의 인생만큼 극적인 드라마도 없다. 사랑의 결핍 속에서 자라난 그는 그 심리적 공복감을 사랑과 감정의 과잉분출로 해결하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자신의 파멸을 가져왔지만 바로크라는 새로운 예술탄생의 원동력이 됐다. 광기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