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산요전기 사장으로 취임한 이우에 사토시(井植敏)는 꿈이 컸다. 창업자의 장남이라는 아우라를 무기로 취임하자마자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폈다. 내수에 중점을 두던 사업 체질부터 바꿔나갔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승승장구였다. 대형마트 체인 월마트를 통해 미국 시장을 개척했고,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과 손잡고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길도 열었다.

이우에 사장은 한때 ‘오사카의 잭 웰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회사가 절정기를 맞았을 무렵,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다. 파나소닉 같은 종합 전자메이커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산요 창업자인 이우에 도시오(井植歲男)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파나소닉 창업자의 처남이다. 이우에는 1947년 산요를 세우기 전까지 마쓰시타전기(옛 파나소닉)에서 일했다. 라디오 사업으로 시작한 산요는 일본 최초로 회전식 세탁기를 선보이며 일본 대표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산요의 모토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였다. 소니와 파나소닉 등 버거운 상대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는 틈새전략이었다. 경영학자들은 이런 전략을 ‘엑설런트 니치(excellent niche)’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주력 사업에서 한국과 중국 업체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사장이던 이우에 사토시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목표는 파나소닉 같은 종합 전자메이커로 잡았다. 우선 반도체 사업에 손을 댔다. 이어 ‘가전의 꽃’으로 불리던 액정 패널 사업도 시작했다. 그러나 판단 착오였다. 반도체와 액정 패널 모두 한국 등 경쟁 기업에 이미 주도권이 넘어간 뒤였다.

구조조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확대 경영을 한 상처는 심각했다. 그동안 강점을 가졌던 가전 분야도 덩달아 무너지기 시작했다. 2005년엔 2000억엔(약 2조7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적자를 냈다.

2008년 휴대폰 사업부문을 일본 교세라에 매각했고, 2009년엔 결국 회사 전체가 파나소닉에 인수·합병됐다. 파나소닉의 우산 아래 들어간 뒤에도 수난은 계속됐다. 2010년 7월엔 반도체 부문이 미국 업체에 넘어갔고, 산요의 자존심이던 백색가전 부문도 작년 중국 하이얼에 팔렸다. 일부 가전과 태양전지 등이 형제 기업인 파나소닉에 남아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올 1월부터 산요라는 이름 대신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통합됐다. 산요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