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허균의 호민론(豪民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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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
당시 사회에선 혁명적인 내용
역적 혐의로 생 마감한 지식인
당시 사회에선 혁명적인 내용
역적 혐의로 생 마감한 지식인
허균(許筠·1569~1618)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한국사에는 수많은 인물이 명멸했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인물도 흔하지 않다. 당시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됐고, 그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돼 1618년 역적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자료는 한결같이 허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천지 사이의 괴물’로까지 표현한 기록도 있다.
“합사(合司)하여 아뢰었다.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에 격서(檄書)를 던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역모를 꾸민 정상이 이미 민인길의 고발에서 드러났고, 이홍로와 결탁해 동궁(東宮)을 해치려 꾀한 사실이 또 기준격의 소에서 나왔습니다. (…) 신들은 이런 죄인의 이름이 있으니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더라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택당집》은 허균 이외에도 16~17세기에 활약한 주요 인물의 행적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인물 평가에 대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자료다. 따라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임은 거의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홍길동전》에 나타난 적서차별의 부조리한 사회현실 고발, 초능력을 지닌 영웅의 출현 등은 허균의 꿈이 구체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3남2녀 중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맏형 허성과 중형 허봉은 그의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허균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이 있었다.
명문재사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조선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은 ‘유재론(遺才論)’이나 ‘호민론(豪民論)’과 같은 글을 통해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을 발견하고 능력있는 인재의 적극적인 등용을 주장했다. 허균의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호민론’을 보자.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런 주장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특히나 소설에서 설정한 주인공 홍길동의 캐릭터는 호민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가정에서의 신분적 제약과 사회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에 부닥쳤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호민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허균은 ‘유재론’이나 ‘호민론’과 같은 글을 통해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줄곧 주장했다. 이런 개혁 의지는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역모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지식인의 책무를 그가 스스로 실천했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합사(合司)하여 아뢰었다.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에 격서(檄書)를 던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역모를 꾸민 정상이 이미 민인길의 고발에서 드러났고, 이홍로와 결탁해 동궁(東宮)을 해치려 꾀한 사실이 또 기준격의 소에서 나왔습니다. (…) 신들은 이런 죄인의 이름이 있으니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이더라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택당집》은 허균 이외에도 16~17세기에 활약한 주요 인물의 행적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인물 평가에 대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자료다. 따라서 《홍길동전》의 작자가 허균임은 거의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홍길동전》에 나타난 적서차별의 부조리한 사회현실 고발, 초능력을 지닌 영웅의 출현 등은 허균의 꿈이 구체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3남2녀 중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맏형 허성과 중형 허봉은 그의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허균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이 있었다.
명문재사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조선중기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은 ‘유재론(遺才論)’이나 ‘호민론(豪民論)’과 같은 글을 통해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을 발견하고 능력있는 인재의 적극적인 등용을 주장했다. 허균의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호민론’을 보자.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 대저 이루어진 것만을 함께 즐거워하느라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이란 항민(恒民)이다. 항민이란 두렵지 않다. 모질게 빼앗겨서, 살이 벗겨지고 뼈골이 부서지며, 집안의 수입과 땅의 소출을 다 바쳐서, 한없는 요구에 제공하느라 시름하고 탄식하면서 그들의 윗사람을 탓하는 사람들이란 원민(怨民)이다. 원민도 결코 두렵지 않다.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란 호민(豪民)이다. 대저 호민이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런 주장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특히나 소설에서 설정한 주인공 홍길동의 캐릭터는 호민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가정에서의 신분적 제약과 사회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에 부닥쳤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호민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허균은 ‘유재론’이나 ‘호민론’과 같은 글을 통해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줄곧 주장했다. 이런 개혁 의지는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의 창작으로 나타났다. 역모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지식인의 책무를 그가 스스로 실천했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