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의 사업다각화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는 다 있는 현상이다.” 진보적 경제학자로 꼽히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49)가 삼성 사장단 앞에 섰다. 장 교수가 삼성 같은 국내 대기업에서 강연하기는 처음이다. 진보성향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인사로 드물게 삼성을 띄워주기도 하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조건적 비판은 역사성 무시”

장 교수는 19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삼성 사장단들에게 ‘한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른바 재벌로 불리는 국내 대기업의 발전 역사로 운을 뗐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재벌이 주력업종을 벗어나 사업다각화를 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됐다”며 “핵심 역량만 강조하면 삼성은 아직도 양복지나 설탕만 만들어야 하고 현대는 길만 닦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업이 다각화된 것은 기업들의 성장의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하라고 하면서 떠맡긴 것이 더 큰 이유”라며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사업 다각화가 나타나는 것처럼 국내 재벌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모두 역사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 뜯어고치려는 대기업의 순환출자에 대해서도 옹호론을 펼쳤다. 장 교수는 “예전에는 지주회사를 금지하고 교차소유도 못하게 해서 기업들이 사업다각화를 하려면 순환출자밖에 할 수 없었다”며 “이제와서 순환출자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역사성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쏴붙였다.

재벌 개혁론의 정답처럼 통하고 있는 주주자본주의도 비판했다.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를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고 1주당 1표의 의사결정권을 줘야 하며 소액주주 이익보호를 위해 사외이사를 많이 둬야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했다. 그는 “주주자본주의 원리에 맞는 구조를 가진 기업은 한정돼 있으며 오히려 이런 기업이 더 잘못됐다”며 “주주자본주의를 근거로 대기업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 아니다”

장 교수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그는 “주주자본주의에 입각한 재벌 개혁은 경제민주화의 본질이 아니다”며 “시민권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흔히들 복지를 강조하면 성장이 어렵다고 하는데 복지가 성장의 바탕이 될 수 있다”며 “1~2년 새 되지 않고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대기업들도 이런 부분을 생각해 달라”고 조언했다.

경제민주화가 논의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대기업이 국민 지원 위에서 큰 게 사실이 아니냐”며 “결국 혼자 큰 게 아니라는 데서 경제민주화 얘기가 나왔으니 대기업들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미국이나 유럽처럼 우리나라도 산업이 약할 때 정부가 관세든 뭐든 해서 대기업을 보호해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장 교수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 뒤 기업도 사회적 대타협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의 필요성도 인정받으면서 국민에게 무엇인가 돌려주고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저출산 고령화와 높은 자살률 등으로 일어나는 문제를 막기 위해 시민권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며 “기업들도 이런 부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장남인 장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케임브리지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1990년부터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사다리 걷어차기’(2002)와 ‘나쁜 사마리아인들’(2007),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0) 등이 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