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영국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뒤적이다가 이 대목이 눈에 띄었다. “물체가 정지 상태일 경우,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지 상태를 계속한다. 물체가 운동 상태라면 그것은 그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제1부 제2장 첫 부분이다.

이 부분은 바로 아이작 뉴턴의 운동 3법칙의 첫째인 ‘관성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영국인이지만, 홉스는 뉴턴의 선배일 터, 과학자가 아닌 홉스가 뉴턴의 법칙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뜻밖의 발견(?)에 놀라 좀 연구를 해 보았다. 짐작대로 뉴턴(1643~1727)은 홉스(1588~1679)가 55세 때 태어났다. 당연히 뉴턴의 대표작 《프린키피아》(원제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687)는 《리바이어던》(1651)보다 뒤에 출판됐다. 그렇다면 과학자 뉴턴은 그의 운동 법칙을 사회과학자 홉스에게서 배웠던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홉스가 활동하던 17세기 초에 이미 운동 법칙은 유럽 지식층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은 이미 물체와 운동을 모든 것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그 전제 위에 그들의 생각을 펼쳐 나갔다. 홉스 역시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을 제1부 인간, 제2부 국가, 제3부 그리스도교적 국가… 식으로 써가며, 인간을 감각-상상-언어-지식 등을 거쳐 종교-자연법-인격체 등으로 확대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상상 역시 물질과 운동 현상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이 자연현상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연구에도 원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운동 법칙만 놓고 보자면, 그것은 이미 뉴턴 이전에 널리 알려졌고, 지식인들의 사유의 전제가 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말하자면 홉스는 과학적 방법으로 사회를 분석했고, 뉴턴은 한참 뒤에 같은 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천체와 물체의 운동을 연구한 것이다. 홉스는 세 번이나 유럽을 방문했는데, 한 번은 피렌체로 가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직접 방문한 일도 있다. 갈릴레이는 뉴턴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미 관성 운동도 말하고 있었다. 또 프랑스에서는 더 많은 과학자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니 홉스가 이 교류를 통해 많은 과학 연구를 체험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그는 《광학(光學)》 같은 과학연구 성과도 남기고 있다.

홉스는 한 사람의 과학자로도 꼽힐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자연에 있지 않고 사회에 있었다. 인간이란 서로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리며 다툴 수밖에 없다. 홉스의 가장 유명한 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란 이런 인간의 원초적 상태를 나타낸다. 혼란과 투쟁 속의 인간을 그 나락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신의 자연권을 위임하는 별도의 주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근대국가이고, 그것은 어찌 보면 바람직하지 못한 존재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원래의 《리바이어던》 표지는 한손에 칼, 다른 손에 왕의 권능을 상징하는 홀(笏·관위에 있는 사람이 위엄을 갖추기 위해 손에 쥔 가늘고 긴 판으로 된 물건)을 든 괴물로 묘사돼 있다. 그 괴물의 출처는 기독교 성서였고.

사회계약설의 시작을 알린 그의 근대국가는 한 사람이 주권을 장악하는 전제군주제, 몇 사람의 귀족제, 그리고 모든 사람의 민주제로 제시되는데, 셋 모두 가능하지만, 그는 전제군주를 더 이상적인 듯 말하고 있다. 그의 ‘과학적’ 사회 연구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국가란 전제군주제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필요악이다. 민주사회를 구가하는 오늘의 세상에 걸맞지 않은 주장일지는 모르지만….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모두 근대물리학의 운동 법칙을 바탕삼아 전개됐다는 사실은 17~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공통적 광장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직 문과니 이과니 하는 구별은 없었고, 홉스의 책을 뉴턴이 읽고, 뉴턴의 저서가 사회학자들에게 읽히는 그런 시대였다. 편파적 지성을 기르고 있는 현대인들(특히 한국의)이 한번 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란 생각이 든다.

김은정 증권부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