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범죄의 희생자가 당한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억만금의 손해배상을 하더라도 죽은 자가 돌아올 수는 없다. 희생자가 당한 피해는 단순히 목숨만이 아니다. 희생자의 미래까지 송두리째 날아갔다. 희생자가 누릴 수 있었던 개인적 행복은 물론 그가 사회를 위해 중요한 공헌을 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그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희생자의 유족은 “만일 그때 내가 함께 했더라면”과 같은 부질없는 가정법에 시달리며 많은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한다. 범죄자에게 직접 보복과 응징을 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야 한다. 희생자의 친구와 같이 가까운 사람들 역시 회복할 수 없는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치명적인 사건을 회상하며 지속적으로 불안 증상을 나타내는 것)’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범죄는 희생자뿐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야만 중의 야만이다. 그래서 근대 형벌의 역사는 살인죄에 대한 응보형인 사형으로 시작됐다. 희생자가 죽었으니 범죄자도 죽어야만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피해가 보상되는 것은 아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는 것도 아니다. 사형은 살인 범죄 후의 또 다른 살인에 다름 아니다. 살인의 주체가 범죄자 개인에서 국가로 바뀐 것일 뿐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국민 개인에게 금지된 살인을 국가에 허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국가는 무슨 권한으로 살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개인 간의 원한이나 감정 또는 우발적으로 살인하는 것은 금하면서 국가가 막강한 물리력을 행사해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철저히 계산된 방법으로 살인하는 것은 왜 정당화되는가. 이것은 법 이전의 문제이므로 “법이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될 수 없다. 왕 또는 신이 국가에 부여한 권한이라고 해석하지 않는 한 근대국가에서는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이 사형제가 갖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다.

범죄자의 비이성적 방법에 의한 살인에 대해 최고형을 선고하는 것은 피해를 회복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에 의한 살인 역시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없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형 집행 결과는 영원히 불가역적이다. 사형 집행 후 진범이 잡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가 오판한 경우이다. 형사판결이 확정된 뒤 진범이 나타나는 무수한 경우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국가를 처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형은 오판을 시정할 기회를 영원히 닫아버리는 것이다. 국가의 모든 행위는 전지전능하거나 항상 정당화된다는 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면 오판에 의한 사형을 정당화시킬 근거는 없다.

사형은 근대형벌의 목적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형은 유족 입장에서 심정적 대리보복의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수형자의 교화·개선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형벌의 현대적 목적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다. 사형은 수형자를 교화하는 교정 원칙을 포기하는 행위다. 근대형벌이 수형자의 신체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하고 가혹한 방법을 폐지했는데, 신체 일부보다 훨씬 중요한 생명 단절을 허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체벌이나 태형마저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국가에 의한 살인을 허용하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납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제도가 범죄자들의 범죄를 막거나 줄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형제도가 극악 범죄를 줄인다는 연구나 보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과거 1970~1980년대 사형을 엄격하게 집행하던 때 살인 범죄율이 사형 집행을 하지 않던 10년간보다 훨씬 높았다는 보고만 나와 있다.

대부분 외국들이 사형제를 폐지한 중요 이유는 살인 범죄 등 강력 범죄를 줄이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형제를 유지하고 집행하고 있는 미국, 중국, 일본 등에서 참혹한 중대 범죄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사형제의 범죄 억지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직접 증명한다. 사형제는 감형 없는 종신형제도의 도입과 함께 폐지하는 것이 타당하다.

몇 해 전 사형 폐지국인 이탈리아의 무기수 700여명이 사형제 부활을 요구하며 단식시위를 벌였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 친척 등 8000여명도 이에 동조했다. 시위에 앞서 무기수 300여명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것에 염증을 느끼며, 한번에 죽고 싶다”는 탄원서를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사형제보다 종신형이 범죄자에게 더욱 강한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난 여름 정부의 개방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반대하는 한 극우주의자의 테러로 80여명이 사망한 노르웨이에서 정부와 시민들이 보여준 태도는 사망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노르웨이 총리는 “폭력에 대한 노르웨이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개방성, 더 확대된 정치 참여”라며 “테러 이전에도 이후에도 노르웨이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천명했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희생자를 추모하며 노르웨이가 평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마음을 모았다. 범죄와 폭력에 대해 더 크고 강력한 물리력으로 맞서는 우리나라 공권력의 태도와 180도 다른 노르웨이 정부와 국민들의 태도가 범죄 억지력은 물론 사회 안전성을 훨씬 크게 할 것이란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묻지마 범죄, 아동 등 흉악한 성범죄 앞에서 국민 감정이 그 어느 때보다 격앙되고, 따라서 사형 집행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응보와 보복심리 작용으로 당연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범죄가 극악해진다고 해서 사형제도가 헌법정신과 국제인권법 원칙에 반하고, 모순되고 불합리하며, 현대 사회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야만 제도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