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 수많은 모델과 잠자리 후 관능미 넘친 명작 쏟아내
정신적 사랑 나눈 플뢰게, 방탕 용인…예술혼 꽃피게
클림트의 공식적 미망인(클림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에밀리 플뢰게는 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클림트가 여인을 탐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아이를 갖지 않은 여인들까지 고려한다면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수많은 여인과 살을 맞댔지만 클림트와 평생 동안 관계를 지속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플뢰게뿐이었다. 그는 동생 에른스트의 처제로 촉망받는 의상 디자이너였다. 클림트는 플뢰게와 사랑만 나눈 게 아니었다. 함께 연극을 보러 다니고 때때로 의상을 공동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둘의 육체적 관계는 잠깐뿐이었고 평생 정신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사랑이 식은 후에도 매년 여름 함께 휴양지에서 바캉스를 보내 서로의 연대감을 확인했고 플뢰게가 빈에 없을 때면 클림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엽서를 띄우곤 했다. 보통 여자라면 이런 어정쩡한 관계를 진작에 정리했을 텐데 이 여인은 희한하게도 난봉꾼 클림트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은 뒤에도 뒷일을 마무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클림트가 죽은 후에는 어떤 남자와도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그는 클림트의 명예를 지키는 데도 남다른 ‘공헌’을 했다. 클림트 사후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나 증거들을 모조리 없애버림으로써 미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덕분에 마리 짐머만을 제외한 클림트의 여인들은 이름조차도 희미한 상태로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클림트는 육체적 욕망을 다른 여인을 통해 채우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플뢰게에게 가 있었다. 글쓰는 것을 배멀미의 고통만큼 두려워한 클림트지만 플뢰게에게는 4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플뢰게의 순정은 아마도 클림트가 자신에게 보여준 ‘정신적 순결’에 바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클림트의 마음이 플뢰게에게서 떠난 적은 단 한번. 짐머만과 사랑을 나눌 때였다. 이때도 물론 플뢰게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클림트가 19세의 짐머만을 만난 것은 36세(1898) 때였다. 가구공의 딸인 그는 어느날 갑자기 아틀리에로 찾아와 모델을 서겠다며 옷고름을 풀었다. 클림트가 짐머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플뢰게에게 보낸 다소 의례적인 편지와 비교해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플뢰게와는 감정이 빠진 의례적인 얘기만을 주고받았지만 짐머만과는 서슴없이 사적인 얘기를 교환했다. 또 편지를 보낼 때마다 지폐를 두둑히 넣어 보냈다. 둘이 만난 이듬해 짐머만은 첫 아들 구스타프를, 1902년에는 둘째 오토를 낳았다. 클림트는 두 아이를 무척 사랑했고 세 사람을 위해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클림트는 짐머만과의 관계가 밖으로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순간 사생활의 자유는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동반자인 플뢰게와 끝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도 부부관계로 인한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주위의 이목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사생활을 은폐하려는 의지는 그림을 제작할 때도 지켜졌다. 그는 1902년 초여름 오토를 잉태한 짐머만을 모델로 한 누드화 ‘희망I’을 그렸는데 이때 몸만 짐머만을 모델로 했고 다른 모델의 얼굴을 조합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그림을 통해 사생활의 비밀을 캐려던 주위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클림트와 짐머만의 관계는 1903년을 기점으로 싸늘하게 식어간 것 같다. 오토를 낳은 후 짐머만의 건강이 악화되자 클림트는 짐머만을 아이들과 함께 빌라흐로 요양을 보냈다. 이후 둘의 관계를 알려주는 기록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14년 9월 짐머만이 요제프슈테터 거리에 있는 클림트의 화실 근처로 이사를 와 이에 부담을 느낀 클림트가 화실을 옮겼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1914년까지는 느슨하나마 연락을 취하고 지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완전히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짐머만과의 관계를 정리한 후에도 클림트의 육체적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클림트는 그가 그린 대부분의 모델들과 잠자리를 같이했다. 그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적나라한 묘사는 단순한 누드모델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성적 방종이 클림트의 예술적 완성의 일등 공신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플뢰게 말고 그와 진정으로 정신적 교감을 나눈 여인은 없었다. 클림트는 관능의 유영(遊泳)을 마친 후 플뢰게의 정신적 품안에서 마음을 정화했다. 플뢰게는 예술가의 예술혼이 어떻게 하면 빛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유일한 여인이었다. 관능으로 가득 찬 클림트의 그림이 퇴폐로 떨어지고 않고 찬란하게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다. 클림트가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에밀리’를 외친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