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일 국제가전박람회(IFA)에 전시하려던 삼성전자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TV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전자는 수원사업장에서 지난달 21일 포장한 OLED TV 2대가 사라진 것을 1주일 만인 28일 독일 베를린전시장에서 알아채고 독일과 한국 경찰에 각각 수사를 의뢰해 놓은 상태다.

한국에서 독일로 출발하기 전 분실됐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국내 수사를 전담하는 곳은 경기지방경찰청 산업기술유출수사팀. 이 수사팀은 지난해 삼성 측이 의뢰한 AMOLED(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 TV 기술유출사건 조사를 깔끔히 마무리한 인연이 있다. 이번에도 경감급을 팀장으로 12명 팀원 전원이 조사에 나섰다. 이들은 필요할 경우 삼성 OLED TV 개발팀은 물론 육상운송을 맡은 회사 관계자들의 노트북, 이들과 가까운 지인의 이메일, 메신저까지 점검 내부자에 의한 유출 가능성을 확인 할 예정이다.

그동안 기업들은 산업기술이 유출되더라도 이미지 훼손을 우려해 ‘쉬쉬’ 하며 사건 자체가 외부에 노출되는 걸 꺼렸지만 최근에는 핵심기술 유출사건이 늘어나면서 직접 수사기관을 찾아가 사건을 의뢰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경찰도 2년 전 일선경찰서의 ‘경제팀’에서 맡았던 산업기술 유출사건을 전담하는 산업기술유출수사대(산기대)를 출범시켰다. 산기대 출범 이후 수사기간도 단축됐고, 사건 해결 건수도 늘고 있다.

‘컴퓨터 법의학’으로 불리는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 기술의 발달도 산기대 수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산업기술 유출 수법이 정교해지고 있어 이를 전담할 전문인력 양성과 첨단수사기기 도입이 시급한 상황이다.

◆‘산업기술유출수사대’ 올 상반기 70건 해결

산기대는 2010년 7월 서울·경기·부산·인천·경남 등 5개 지방경찰청에 산업기술유출수사전담팀이 신설되면서 출범했다.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는 산업기술 유출사건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산업기술 유출 1건당 기업의 평균 피해금액은 17억원에 달한다. 경찰청 산업기술유출수사지원센터를 ‘컨트롤타워’로 대구·울산·충북청이 합류하면서 현재 8개 지방청 국제범죄수사대 11개 전담팀에 경찰 50여명이 배치되는 등 몸집이 커진 배경이다.

산기대 출범 이후 관련 사건 수사기간부터 대폭 단축됐다. 산기대 출범 전엔 건당 수사가 1년 가까이 걸렸다. 일선 경찰서 경제팀이 동시에 여러 사건에 투입되다 보니 집중수사가 힘들어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산기대 출범 이후 산업기술 유출사건 수사기간은 3개월로 대폭 줄었다.

검거 건수도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엔 46건의 국내 산업기술 유출사건을 해결했다. 산기대가 출범한 2010년엔 40건으로 주춤했으나 수사대가 본격가동된 작년엔 84건, 올 상반기에만 70건의 산업기술 유출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해외로 기술이 유출된 사건도 2010년 9건에서 작년 24건, 올 상반기 14건이 적발됐다. 해외로 산업기술이 유출되는 경우 범행 국가가 대부분 중국이란 사실도 경찰은 주목하고 있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중국에 진출한 중소·벤처기업 10곳 중 4곳 이상, 국내 중소기업 중 10곳 중 1곳 이상이 기술 유출 피해를 입었다.

AMOLED TV 제조기술을 빼돌려 중국에 넘기려던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SMD)와 LG디스플레이 연구원이 지난해 12월 검거된 게 대표적인 기술유출 사례다. 수사팀은 SMD 연구원의 아내 이메일을 추적, 이 연구원이 아내 명의 이메일을 통해 경쟁업체로 기밀을 유출시킨 사실을 입증했다.

경찰 관계자는 “중국뿐 아니라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도 기술 유출에 가담, 최소한 산업기술 유출 분야에 있어서는 해외 경찰과 수사 노하우를 공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컴퓨터 법의학’ 디지털 포렌식 ‘주효’

산기대가 갈수록 정교해지는 첨단기술 유출사건의 배후를 밝혀낼 수 있는 데는 디지털 포렌식이라는 첨단수사기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디지털포렌식이란 각종 디지털 데이터 및 통화기록, 이메일 접속기록 등을 디지털기기로 수집·분석하는 수사기법이다.

산업기술 유출사건 수사의 특성상 특정인이 빼돌린 기술을 어떤 기업이 활용했는지 추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빼돌려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규명하지 못하면 범죄를 입증할 수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다는 게 관건이다.

김권엽 고려대 정보보호연구원(CIST) 선임연구원은 “산업기술 유출사건의 경우 내부자 소행이 많다”며 “빼돌린 소프트웨어를 경쟁업체로 가지고 가 그대로 적용하는 게 아니라 교묘하게 바꾼 뒤 적용하면 범행을 입증하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디지털 포렌식 연구에 매진하는 이유다.

산기대 출범 이후 전국 각 지방청 국제범죄수사대 소속 형사들은 매년 1회 이상 디지털 포렌식 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 3일부터 고려대에서 CIST가 맡은 디지털 포렌식 교육에는 서울청 소속 국제범죄수사대원 20여명이 참여했다. 교육을 맡은 김 연구원은 경찰들에게 노트북에 숨겨진 계좌번호나 주민등록번호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13자리 숫자로 구성된 주민등록 번호의 경우 ‘######-1#####’식으로 검색하면 원하는 번호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계좌번호도 은행 고유의 패턴을 ‘###-#####-####’식으로 검색하면 숨겨진 번호가 드러난다는 얘기다.

그는 “간혹 한글파일 확장자명인 ‘.hwp’를 그림파일인 ‘.jpg’로 바꾼 뒤 숨겨 놓는 경우도 있다”며 “문서 실행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림 실행 프로그램으로 연결되도록 해 수사기관을 따돌리려 머리를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1억원 모바일 장비 도입도 어려워

디지털 포렌식은 산업기술 유출 과정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CIST 센터장인 이상진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사이버국방학과 교수는 “산업기술 유출 수사에 있어서 어느 선까지를 유출된 기술로 봐야 할지 가늠하는 게 쉽지 않다”며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보통 기술이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기업은 상대방 기업이 자신들의 기술을 통째로 훔쳐갔다고 한다”며 “하지만 전체 기술이 아니라 일부 기술만 훔쳐간 경우도 있어 자체 개발한 기술인지 유출해간 기술인지 가려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기술이 유출된 기업이 수사기관에 일종의 자문을 하곤 하는데 이 경우 아무래도 자사에 유리한 쪽의 진술을 하기 마련이라 수사기관의 중립적 판단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모바일 디지털 포렌식 장비 도입도 시급한 상황이다. 예전에는 USB에 담아 외부로 유출했던 문서파일을 요즘엔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은 뒤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빼내는 수법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디지털 포렌식 장비는 2000여만원 수준이지만 모바일 디지털 포렌식 장비는 1억여원 선이라 빠듯한 경찰 예산으로는 엄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

검찰은 2008년 10월 서울 서초동에 디지털 포렌식 센터(DFC·digital forensic center)를 열고 과학수사에 필요한 첨단 장비를 갖췄지만 경찰엔 이런 시설이 따로 없다.

경찰청 사이버테러 대응 센터에서 디지털 포렌식 업무를 맡고 있지만 아직 별도의 센터는 없는 상태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