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만원 내면 대포통장 퀵으로 보내 드립니다"
경기도 여주에 사는 신모씨(44)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제1금융권 마이너스통장 발급’ ‘연체자 누구나 1시간 대출’이라는 광고를 접했다. 사업 실패 후 새로운 사업의 창업 자금이 필요했던 신씨는 대출업체에 곧바로 연락했다. 담당자는 “대출금을 송금받으려면 통장과 선수금 160만원을 먼저 보내라”고 요구했다. 신씨는 사업에 실패한 뒤 쓰지 않았던 통장을 서랍에서 꺼내 주민등록증 사본, 현금카드와 함께 대출 사무실로 보냈다. 신씨는 “사무실과 상담원 휴대폰 번호 그리고 선수금을 보낸 통장 계좌번호 등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담원은 신씨의 통장 등을 받자마자 연락을 끊었다. 신씨가 자신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됐다는 걸 안 건 바로 다음날. 신씨와 일면식도 없는 이모씨가 신씨의 통장에 435만원을 보냈고, 누군가가 신씨의 통장에서 이 돈을 모두 빼간 것이다. 물론 신씨에게 입금된 돈은 아니었다. 신씨는 그길로 여주경찰서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의 설명을 듣고 망연자실했다. 자신의 통장이 사기에 이용될 줄 알았든 몰랐든 사기에 연루됐다면 통장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신씨는 대출사기의 또 다른 피해자인 이씨가 고소하면 고스란히 피해금을 보상해야 할 처지다.

대포통장을 이용한 대출사기와 보이스피싱 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대포통장 주의보’가 내려졌다. 최근에는 기존 수법 외에도 부동산 매매에 대포통장이 이용되는 등 방법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10월1일부터 지난 24일까지 각종 사기 수법에 사용된 대포통장을 조사해본 결과 2만4158개에 달했다. 4월18일부터 시행된 불법사금융신고센터에 현재까지 접수된 대출사기(대출을 빙자해 선불금 등을 편취)는 1만2000여건. 경찰과 금융당국은 대포통장이 국내에 4만개 이상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포통장을 이용한 범죄가 느는 이유는 대포통장을 만들거나 인터넷을 통해 매매하는 방법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라며 “상당수 범죄의 원인이 되는 대포통장의 생성과 유통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폭, 유흥업소 단속에 대포통장으로 눈 돌려

지난 30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서류상 회사 명의로 대포통장을 만들어 판매한 혐의(전자금융거래법 위반)로 폭력조직 행동대원 조모씨(31) 등을 붙잡고 크게 놀랐다. 이들의 대포통장 생성수법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씨는 대포통장 개설과 판매 등 총책임을 맡았다. 대포통장은 인터넷 사이트에 ‘대포통장 판매’라는 글을 올려 퀵서비스 등을 이용해 거래했다.

이모씨(38) 등 두 명은 ‘서류 제조책’으로 서류상 회사를 설립하고 법인 등기부등본과 인감도장 등을 만들었다. 이렇게 한 개의 법인을 설립하는 데 100만원도 들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모씨(31)는 서류 위조책으로 은행에서 통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회사 대표 위임장과 재직증명서 위조를 담당했다.

이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 직접 은행에 보내 통장을 개설했다.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일부 사채업자들이 노숙자 명의를 빌려 대포통장을 만드는 사례는 있었지만 조직폭력배들이 대포통장을 전문적으로 만들어 돈벌이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처럼 대포통장 개설 방법은 꾸준히 진화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보이스피싱 사기단 등이 노숙자 등의 인적사항을 빌려 범행에 사용했다. 노숙자에게 10만~20만원을 주고 인감증명 인감도장 주민등록증 사본과 등본을 사 ‘유령 법인’을 만들어 그 명의로 대포통장을 개설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사기단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리 대출을 해주겠다며 통장과 현금카드, 비밀번호 등을 확보한 뒤 곧바로 일회용 대포통장으로 사용한다. 최근에는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대포통장’만 입력하면 쉽게 구할 수 있다.

◆수사망 피하려 ‘다단계’ 배달

기자가 인터넷에 뜬 광고를 보고 대포통장 구입을 시도해봤다. 유통업자에게 전화로 ‘대포통장’을 원한다고 연락하자 “40만원에 택배비 1만5000원이면 두 시간 만에 배달해줄 수 있다”고 했다. “돈만 주고 연락을 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퀵서비스 기사에게 통장 등을 보낼테니 확인 후 돈을 주면 된다”고 답했다.

경찰이 나섰지만 대포통장을 만들고 유통하는 사기단을 검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점조직으로 움직이고 적발되더라도 모두 대포폰과 대포차량을 사용하기 때문에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 대포통장의 배달은 퀵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은밀한 장소에서 만나 ‘현찰 박치기’하는 방법으로 수사망을 피한다. 수령인에게 물건이 도착할 때까지 퀵서비스를 여러 번 이용하는 ‘다단계’ 배달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대포폰 제조 일당을 붙잡아도 제조 일당과 유통 일당 간 일면식이 없는 경우가 많아 대포폰을 사고판 사람들을 붙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사 단계마다 추적 경로가 끊겨 일당을 검거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포통장 주인, 민·형사 책임 면할 수 없어

이렇게 만들어진 대포통장은 불법 대출, 신용등급 상향, 부동산 매매 등 다양한 사기 수법에 이용된다. 지난 1월 김모씨(57)는 이혼 후 새 사업을 하기 위해 충북 제천에 가지고 있던 땅 500여평을 내놓았다. 제천지역 부동산 두 곳과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땅을 판다는 글을 올렸지만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 탓에 좀처럼 매매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6월 김씨가 남긴 연락처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놓은 땅값보다 20% 비싼 가격에 팔아준다는 중개업자가 나타난 것.

중계업자는 김씨에게 부동산 매매를 위해 우선 감정평가서가 필요하다며 감정평가를 의뢰한다는 명목으로 김씨에게 수백만원을 요구했다. 김씨는 “통장 계좌번호와 명함 그리고 휴대폰 번호까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사기일 거란 의심은 해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해당 중계업자는 인터넷에 부동산을 판다고 글을 올린 사람에게 연락을 하고, 감정평가서를 발급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가로챈 업자였다.

사기단에 속아서 넘긴 통장이지만 범죄에 악용될 경우 통장 주인에게 책임을 물은 판례도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 3월 서울 서부지법은 보이스피싱 피해자 정모씨(44)가 보이스피싱에 사용된 대포통장 주인 K모씨(49) 등 7명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피해액의 60%를 보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K씨 등이 검찰청을 사칭하는 홈페이지에 접속해 개인정보 및 은행계좌 정보를 입력한 것은 참작하지만 (결과적으로) 범죄 행위를 도운 것이므로 공동 불법 행위자로서 손해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김우섭/박상익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