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피고인이 판사 앞에서 반성한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형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지난 16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1심 재판부가 “반성이 없어서 엄하게 처벌한다”고 판결, 반성의 유무가 양형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양형기준표에는 ‘반성없음’ 없어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2012)에 따르면 ‘반성없음’과 ‘진지한 반성’ 모두 형량 범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양형인자)다.

특히 ‘반성없음’은 ‘범행수법이 매우 불량한 경우’ ‘범죄수익을 의도적으로 은닉한 경우’ ‘대량 피해자를 발생시킨 경우’ 등과 함께 형량의 가중 여부를 결정짓는 특별양형인자로 분류된다.

예컨대 300억원 이상 횡령범이 법정에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뻔뻔한 낯을 하는 등 가중요소가 감경요소보다 더 많을 경우 양형기준은 판사에게 기본형량 범위(5~8년) 대신 가중형량 범위(7~11년)를 택하게 한다. 단, 범행을 단순히 부인하는 것은 ‘반성없음’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에 김 회장에게 주로 적용된 횡령배임죄의 양형기준표에는 ‘반성없음’이라는 문구 자체가 있지 않다. ‘반성없음’이 양형기준표에 명시적으로 규정된 경우는 살인죄나 상해치사 등 사망사건에서다. 중한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 않는 범법자를 가중처벌하는 양형인자로 활용되는 것이다.

◆“양형기준대로 선고한다”더니

그렇다면 횡령배임죄 재판에서 양형기준표에 없는 ‘반성없음’이 판결문에 가끔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반성의 유무는 양형기준표를 떠나 판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참작사유 중 하나”(대법원의 한 판사)라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범법자의 연령, 범행의 동기 등 형법(51조)에서 예시한 참작사유를 비롯해 수많은 양형인자를 일일이 다 양형기준표에 열거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2010년의 경우 3889건의 횡령배임죄 판결 가운데 21건(0.5%)에서 재판부가 ‘반성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판결문에 썼다. 양형기준표에 나와 있지 않으니 평소에 판사들이 양형인자로 별로 채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 경우 ‘반성없음’의 위력도 특별양형인자에는 못 미친다.

판사들은 결정된 형량범위 내에서 선고형을 정하는데 고려요소로 작용하는 일반양형인자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별양형인자에 의해 결정된 형량범주가 기본형량(5~8년)일 경우 ‘반성없음’은 다른 가중요소와 결합돼 5년형 대신 6년형을 택하도록 권유한다. 한화사건 재판부가 김 회장에게 내린 ‘반성없음’ 판결도 양형기준표에는 없는 일반양형인자의 하나였다. 재판부는 2883억원의 업무상배임죄 혐의를 받는 김 회장에게 ‘반성이 없다’면서도 기본형량(5~8년)을 기준으로 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진지한 반성’ 빈번한 감경사유

김 회장의 경우와 달리 대부분 피고인들은 재판정의 최후변론 등에서 잘못을 빈다. 피해를 재빨리 보상하거나 반성문을 써내기도 한다. 이런 ‘진지한 반성’은 모든 범죄에 일반양형인자로 들어가 형을 깎는 감경요소로 작용한다. 2010년 횡령배임죄 재판부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감경사유가 ‘진지한 반성’이었다. 전체 3889건 중 1570건(40.4%)에서 감경사유로 작용했다.

감경빈도 2위는 ‘형사처벌 전력없음’(665건, 17.1%)이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런 현실과 관행 때문에 의뢰인들에게 판사 앞에서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깍듯한 자세를 취하라고 주문한다”고 말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