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형제가 한국에 있는데도,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 그건 전적으로 일본 책임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1월, 대통령 당선인 특사 자격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한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에게 자민당의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가 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런 형제’란 이 부의장과 이 대통령 당선인을 말한다. 두 사람이 일제 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인연이 있는 데다, 모두 경제인 출신답게 한·일 관계에서 ‘과거’ 보다 ‘미래’를 추구하는 데 대한 평가였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정부 시절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던 한·일 관계는 이명박 정부 들어 한때 ‘최상’이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다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0일 독도를 방문한 이후 일본엔 예민한 ‘일왕의 사과’까지 거론하며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일본에선 15일 민주당 정권 들어 처음으로 일부 각료가 A급 전범을 합사(合祀)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 영사관엔 벽돌이 날아들기도 했다.

최상에서 최악된 한·일관계

미래를 향해 사이 좋게 나아갈 줄만 알았던 MB 정부에서의 한·일 관계가 뒤틀린 건 왜일까. 결정적이었던 건 작년 12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이 대통령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있는 조치를 요구하자 노다 총리는 적반하장 격으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종군위안부 피해자 상징물) 철거를 주장했다. 화가 난 이 대통령은 노다 총리와 20분간 잡혔던 산책을 10분 만에 끝내고 귀국해버렸다. 그 연장선에서 이번 독도 방문이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어쨌든 MB 정부의 한·일 관계도 역대 정권의 전례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권 초엔 선린우호로 출발했다가도 정권 말로 가면 악화되는 게 두 나라 관계였다. 그래서 한·일 관계는 무거운 바위를 간신히 산꼭대기까지 올려놓으면 다시 미끄러져 내리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에 비유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1995년 11월)고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외교전쟁도 불사하겠다”(2005년 3월)면서 한·일 관계가 파국을 맞은 건 모두 임기 중반 이후다.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 돌파를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한 것이란 지적도 있지만, 그 빌미는 언제나 일본이 제공했다.

외교 파국은 서로의 불행

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자이퉁(Sueddeutsche Zeitung)은 지난 11일자 신문에서 “일본은 전쟁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형식적 사과를 하긴 했지만, 계속해서 상대적인 잘못이라고 주장해왔다. 일본은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 지금까지 매우 게을렀다”며 “그런 태도가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불렀고, 이는 일본에 ‘외교적 파산’을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영원히 등질 수만은 없는 게 한·일 관계란 점이다. 두 나라의 교역액은 지난해 1000억달러를 넘어섰고, 외환위기에 대비해 700억달러의 통화스와프(맞교환) 협정도 맺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으로 체제적 가치를 공유하는 우방이고, 동북아시아 세력 균형의 중요한 축이다. 이런 나라들이 원수가 돼서 서로에 득될 게 없다.

상호 전략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한·일 관계가 ‘우호무드→과거사 촉발→외교적 파국’이란 악순환을 거듭하는 건 두 나라 모두에 또 하나의 ‘불행한 역사’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쪽은 어딜까. 4년 전 모리 전 총리의 말이 생각나는 이유다.

차병석 정치부 차장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