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의 비애'…사료용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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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급감…올 생산 8만4500t 역대 최저
수매제 폐지·수입산에 밀려
웰빙 트렌드에 한가닥 희망
농진청, 사료용 개발 나서
수매제 폐지·수입산에 밀려
웰빙 트렌드에 한가닥 희망
농진청, 사료용 개발 나서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국민가곡 ‘보리밭(박화목 시, 윤용하 곡)’의 한 구절이 이제는 가물가물한 ‘옛 생각’이 될지 모르겠다. 올봄 국내 보리 생산량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급감했다. 식탁에서는 쌀밥과 빵에 일찌감치 밀려났고, 맥주 공장에서는 수입보리에 치이고 있다. 과거 한국인의 주식이었던 보리는 이제는 가축 사료로 활로를 찾아야 할 처지다.
◆생산량의 70%가 주정으로
31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봄 국내 보리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22.6% 감소한 8만4525t에 머물렀다. 조사가 시작된 1966년 이후 최소치다. 보리 생산량은 2008년 처음 20만t을 밑돈 이후 매년 급감, 1970년대 연간 생산량(159만t)의 5.3%로 쪼그라들었다.
보리는 기원전 5세기 한반도에 전해진 이후 쌀과 함께 ‘주곡’ 위상을 누렸다. 늦가을에 씨를 뿌리고 이듬해 5~6월에 걷는데, 춘궁기 서민의 굶주림을 덜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국민들이 보리가 제대로 여물기 전까지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누구든 보리 한줌에 품을 팔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쌀 증산이 이뤄지면서 보리는 ‘잡곡’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1인당 보리 소비량(연간)은 70년대 37.3㎏에서 지난해 1.3㎏으로 급감했다. 군대 역시 2003년 창군 55년 만에 처음 흰 쌀밥으로 전환했다. 지금은 국내산 보리의 70% 이상이 밥 대신 주정으로 사용된다.
◆웰빙 먹거리냐 가축 사료냐
‘보리의 추락’이 본격화한 것은 2007년 이후다. 당시 공급 과잉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2012년 보리 수매제도를 전면 폐지하기로 했다. 정부의 매입가격도 매년 2~6% 인하되자 농민들은 보리 재배면적을 줄여나갔다. 농촌 고령화와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보리 이모작을 선택하는 농가도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최대 수요처인 맥주 공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에서 수입 보리에 밀리고 있다. 최재성 국립식량과학원 박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15년에 걸쳐 관세가 철폐되면 식량용 보리도 수입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는 ‘보리 파동’ 조짐도 일었다. 맥주업체들은 정부 시책상 국산 보리를 일정량 써야 하는데, 최근 공급이 급감하자 품귀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한 관계자는 “작년 수매가격 기준으로 3만2000원 선(40㎏)이었던 보리 값이 올봄 4만5000~5만2000원까지 뛰기도 했다”며 “업체마다 산지를 찾아 밭떼기에 나섰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보리의 앞날은 웰빙 트렌드에 달려 있다고 본다. 성인병 예방에 좋은 베타글루칸과 식이섬유 등이 다량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 식감을 개선한 흰찰쌀보리 등이 개발돼 반응을 얻고 있다.
또 다른 길은 사료용 작물이다. 농촌진흥청은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 가축 입맛에 맞는 사료용 보리종자 개발에 착수했다. 고품질 소고기 시장을 갖고 있는 일본에서는 특히 국내 보리사료에 관심이 높다는 설명이다. 최 박사는 “한국인의 주식이던 보리는 이제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