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 20세 연하 헤어드레서와의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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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토리 - 예술가의 사랑 (2)
병마 시달린 샹송의 전설
힘겨운 투병생활 지켜준 그리스 출신 꽃미남
그들의 진실한 사랑 앞에 비난 퍼붓던 팬들도 감동
병마 시달린 샹송의 전설
힘겨운 투병생활 지켜준 그리스 출신 꽃미남
그들의 진실한 사랑 앞에 비난 퍼붓던 팬들도 감동
“미쳤군. 정말 말도 안 되는 결혼이야. 젊은 친구가 돈과 명예에 눈이 멀었군.”
에디트 피아프가 20세 연하의 청년과 결혼을 발표하자 파리의 언론은 작정한 듯 독설을 쏟아냈다. 팬들의 분노도 하늘을 찔렀다. 자신들의 우상이 젊은 사기꾼의 덫에 걸렸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럴 만도 했다. 46세의 피아프는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60대 노인처럼 늙어버려 도무지 여성으로서의 매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반면 26세의 그리스 청년은 흑발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 꽃미남이었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둘은 마치 병든 엄마와 간병하는 아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둘이 처음 만난 것은 파리 외곽에 자리한 뇌이의 앙브루아즈 팔레 병원에서였다. 석 달 전 피아프의 집에서 옷깃을 스치긴 했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사실상의 첫 만남이었다. 피아프가 병원 신세를 진 것은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때문이었다. 의사의 말을 흘려듣고 강행군을 펼치다 병을 키우고 말았다. 육체적으로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었던 그에게 이제 주어진 생은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평생 ‘장밋빛 인생(라비 앙 로즈)’을 노래한 피아프였지만 인생이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 꿈 같은 사랑이 다가온 것이다. 그를 흠모하던 팬이었다. 테오파니스 람보우키스라는 그리스 청년이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피아프의 품에 귀여운 인형을 안겼다. 그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피아프가 직업이 뭐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당신의 머리를 손질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미용사였다.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가방에 미용도구를 챙겨왔던 것이다. 병실은 순식간에 간이 미용실로 변했다. 그의 능숙한 손놀림에 피아프의 헝클어진 머리는 당장 무대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단정해졌고 푸석푸석한 머릿결은 반들반들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2년 전 조르주 무스타키와 헤어진 후 혼자였던 그는 극도의 외로움에 빠져 있었다. 아니, 사실은 어릴 적부터 한번도 외로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거리의 곡예사를 아버지로, 카바레 가수를 어머니로 둔 그는 부모의 사랑 한번 변변히 받아보지 못한 채 어린 시절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동전을 구걸해야 했다. 142㎝에서 성장을 멈춘 그의 키가 고단했던 어린 시절을 말없이 증언한다.
가수로서 명성을 얻고 난 뒤 빈곤에서는 벗어났지만 외로움은 여전히 그의 곁을 서성거렸다. 수많은 남자들이 다가왔지만 그들은 피아프의 외모가 아니라 그가 가진 명성에 반한 것이었다. 그것은 숭배의 대상에 보내는 타산적인 사랑이었다. 사내들은 그를 디딤돌 삼아 출세를 꿈꿨고 당연히 그 꿈이 이뤄진 뒤에는 그녀를 떠났다. 이브 몽탕이 그랬고, 무스타키가 그랬다.
그런 그 앞에 람보우키스라는 애송이가 나타났으니 언론과 팬들의 분노는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이 그리스 청년에게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그는 호스피스가 무색할 정도로 피아프의 그림자가 되어 정성껏 돌봤다. 피아프를 향한 이 청년의 사랑은 적어도 잠시하다 그만둘 아첨꾼의 사랑은 아니었다. 책을 읽을 기력이 없었던 피아프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됐고 영화를 보고 싶어 하면 피아프에게 영사기를 돌려줬다. 그의 정성스런 보살핌 덕에 피아프는 마침내 기력을 되찾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피아프는 람보우키스를 아예 자신의 집에 눌러앉게 했다. 뭔가 보답하고 싶었던 피아프는 청년이 가수가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청년에게 테오 사라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사라포는 그리스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그리스 청년은 재능덩어리였다. 노래, 연기할 것 없이 당장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1962년 9월25일 피아프는 세상의 악담을 잠재우기 위해 정면 승부를 건다. 에펠탑 공연에서 ‘사랑이 왜 좋을까’를 부를 때 테오와의 듀엣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흠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청중은 둘의 절묘한 하모니와 흠잡을 데 없는 노래 솜씨에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 람보우키스를 파렴치한으로 몰던 언론도 이튿날부터 안색을 바꿨다. 장밋빛 사랑을 갈구하던 피아프는 그렇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1년을 아들 같은 청년의 진실한 사랑 속에서 보냈다.
피아프는 갔지만 그의 노래는 오늘도 우리의 귓가에 사랑의 위대한 힘을 속삭인다.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푸른 하늘이 우리 위로 무너진다 해도 온 세상이 내려앉는다 해도 아무 상관 없어요…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사랑의 찬가’ 중)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에디트 피아프가 20세 연하의 청년과 결혼을 발표하자 파리의 언론은 작정한 듯 독설을 쏟아냈다. 팬들의 분노도 하늘을 찔렀다. 자신들의 우상이 젊은 사기꾼의 덫에 걸렸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럴 만도 했다. 46세의 피아프는 모르핀 과다 복용으로 60대 노인처럼 늙어버려 도무지 여성으로서의 매력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반면 26세의 그리스 청년은 흑발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 꽃미남이었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둘은 마치 병든 엄마와 간병하는 아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둘이 처음 만난 것은 파리 외곽에 자리한 뇌이의 앙브루아즈 팔레 병원에서였다. 석 달 전 피아프의 집에서 옷깃을 스치긴 했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사실상의 첫 만남이었다. 피아프가 병원 신세를 진 것은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때문이었다. 의사의 말을 흘려듣고 강행군을 펼치다 병을 키우고 말았다. 육체적으로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었던 그에게 이제 주어진 생은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사랑이라니!
평생 ‘장밋빛 인생(라비 앙 로즈)’을 노래한 피아프였지만 인생이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 앞에 꿈 같은 사랑이 다가온 것이다. 그를 흠모하던 팬이었다. 테오파니스 람보우키스라는 그리스 청년이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피아프의 품에 귀여운 인형을 안겼다. 그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피아프가 직업이 뭐냐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당신의 머리를 손질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미용사였다. 그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가방에 미용도구를 챙겨왔던 것이다. 병실은 순식간에 간이 미용실로 변했다. 그의 능숙한 손놀림에 피아프의 헝클어진 머리는 당장 무대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단정해졌고 푸석푸석한 머릿결은 반들반들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2년 전 조르주 무스타키와 헤어진 후 혼자였던 그는 극도의 외로움에 빠져 있었다. 아니, 사실은 어릴 적부터 한번도 외로움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거리의 곡예사를 아버지로, 카바레 가수를 어머니로 둔 그는 부모의 사랑 한번 변변히 받아보지 못한 채 어린 시절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동전을 구걸해야 했다. 142㎝에서 성장을 멈춘 그의 키가 고단했던 어린 시절을 말없이 증언한다.
가수로서 명성을 얻고 난 뒤 빈곤에서는 벗어났지만 외로움은 여전히 그의 곁을 서성거렸다. 수많은 남자들이 다가왔지만 그들은 피아프의 외모가 아니라 그가 가진 명성에 반한 것이었다. 그것은 숭배의 대상에 보내는 타산적인 사랑이었다. 사내들은 그를 디딤돌 삼아 출세를 꿈꿨고 당연히 그 꿈이 이뤄진 뒤에는 그녀를 떠났다. 이브 몽탕이 그랬고, 무스타키가 그랬다.
그런 그 앞에 람보우키스라는 애송이가 나타났으니 언론과 팬들의 분노는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이 그리스 청년에게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그는 호스피스가 무색할 정도로 피아프의 그림자가 되어 정성껏 돌봤다. 피아프를 향한 이 청년의 사랑은 적어도 잠시하다 그만둘 아첨꾼의 사랑은 아니었다. 책을 읽을 기력이 없었던 피아프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됐고 영화를 보고 싶어 하면 피아프에게 영사기를 돌려줬다. 그의 정성스런 보살핌 덕에 피아프는 마침내 기력을 되찾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피아프는 람보우키스를 아예 자신의 집에 눌러앉게 했다. 뭔가 보답하고 싶었던 피아프는 청년이 가수가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청년에게 테오 사라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사라포는 그리스어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그리스 청년은 재능덩어리였다. 노래, 연기할 것 없이 당장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1962년 9월25일 피아프는 세상의 악담을 잠재우기 위해 정면 승부를 건다. 에펠탑 공연에서 ‘사랑이 왜 좋을까’를 부를 때 테오와의 듀엣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흠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청중은 둘의 절묘한 하모니와 흠잡을 데 없는 노래 솜씨에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 람보우키스를 파렴치한으로 몰던 언론도 이튿날부터 안색을 바꿨다. 장밋빛 사랑을 갈구하던 피아프는 그렇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1년을 아들 같은 청년의 진실한 사랑 속에서 보냈다.
피아프는 갔지만 그의 노래는 오늘도 우리의 귓가에 사랑의 위대한 힘을 속삭인다.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푸른 하늘이 우리 위로 무너진다 해도 온 세상이 내려앉는다 해도 아무 상관 없어요…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사랑의 찬가’ 중)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