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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 전국노래자랑 장수 비결이요? 녹화 전 출연자들과 어울려 재주ㆍ끼 맘껏 발산하게 하죠

전국노래자랑 최장수 사회자 송 해

연출가만 300여명 거쳐…각본 없는 진행으로 인기
국민들이 에너지 줘 건강 유지
기업은행장이 직접 찾아와 CF 찍어…반응 좋다니 흐뭇

서울 낙원동 보광빌딩 3층. ‘원로 연예인 상록회’라는 문패가 달린 이곳은 ‘국민 MC’ 송해 선생(85)이 1984년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뒤 마련한 사무실이다. 이 사무실은 지긋한 연배의 영화배우, 감독, 작가, 코미디언, 가수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인 동시에 지역 주민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송 선생은 “사무실이나 낙원동 일대에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들으며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거리를 발굴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할 때엔 미리 내려가 시장에서 지역 주민들과 어울려 지역의 특징과 자랑거리를 파악한다”며 “순댓국을 먹으면서 들은 얘기를 구수하게 풀고 참여자들의 ‘끼’를 발산할 수 있도록 한 게 장수 MC의 비결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MC, 가수, 배우에 이어 CF 활동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그를 최근 낙원동에서 만났다.

▶황해도가 고향인데 젊은 시절은 어땠습니까.

“악기가 좋아 열네 살 때부터 ‘도립극단’이 하는 공연에 아코디언 하나 들고 따라다녔습니다. 더 배우고 싶은 욕심에 당시 음악 계통 학교로는 유일했던 해주예술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러다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전쟁이 났습니다. 게릴라전을 벌이기 위해 구월산에 들어간 인민군 4000여명이 밤마다 내려와 마을을 약탈했어요. 그걸 피해 배를 타고 연평도로 나왔습니다.”

▶전쟁 때 통신병을 하셨다면서요.

“연평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사흘을 걸려 부산까지 왔어요. 배에서 내리자마자 훈련소를 거쳐 육군통신학교로 갔습니다. 급박했던 때라 6년제 과정을 3개월 만에 끝내야 했습니다. 하도 매를 맞아 화장실에 몰래 숨어 밤새 모스부호를 외우던 기억이 납니다. 졸업하고 육군본부에서 통신병 임무를 시작했죠. 그렇게 생활하던 중 전 군에 한 통의 전보를 날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953년 7월27일 밤을 기해 모든 전선에서 휴전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아직도 그 전보를 칠 때 손끝이 떨리던 느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대 후 다시 문화·예술계로 오셨습니다.

“예술 계통으로 가면 집안이 망한다고들 했던 시절입니다. 진행, 연주, 노래까지 최소한 1인 3역은 해야 밥값을 했죠. 그러던 중 동아방송에서 하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명사들이 나와 관객 앞에서 스무고개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요즘처럼 ‘웃음기계’가 없어 썰렁한 분위기였어요. ‘웃기는 사람을 세워야겠다’는 연출가 덕택에 무대에 서게 됐습니다. 라디오지만 웃긴 분장을 하고 나갔더니 사람들이 죄다 뒤로 넘어졌어요. 프로그램이 아주 크게 떴습니다.”

▶전국노래자랑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단 6개월도 보장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프로그램 개편 때마다 초조해 했었죠. 그때 전국노래자랑을 연출하고 있던 사람이 지금 성남문화재단 대표로 있는 안인기 씨(영화배우 안성기 씨의 형)예요. 당시 전국노래자랑은 지금처럼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했어요. 답답해 하던 안씨로부터 ‘같이 한번 해보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말로 다 못할 정도로 기뻤어요. 1984년 첫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최장수 프로그램이 된 비결이 뭡니까.

“당시 TV 프로그램들은 사회자나 출연자가 대부분 짜여진 각본대로만 움직여야 했어요. 그러나 전국노래자랑은 달랐습니다. 저는 물론 참가자들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어요. 그랬더니 아주 재미난 장면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게 장점이 됐죠. 그렇지만 당시 군(郡)이 200여군데에 불과해 길어봐야 2년 반이면 장소가 고갈된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시작하더군요. 인구도 늘면서 갈 데가 점점 많아지는 겁니다. 지금은 지방자치단체가 신청하면 한 3년은 기다려야 할 정도입니다.”

▶30년 가까이 MC를 하고 계십니다.

“일요일에 방송되지만 녹화는 보통 토요일에 합니다. 저는 늦어도 금요일까지는 먼저 녹화 지역에 가 있습니다. 출연자들은 물론이고 그 지역을 잘 알아야 재밌게 진행할 수 있으니까요. 제일 먼저 시장을 찾습니다. 참 얘깃거리가 많은 곳이죠. 시장 상인들이나 지역 주민들과 순댓국도 먹고, 술잔도 기울이면서 그곳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연자들과는 녹화 당일 아침 일찍 만나서 얘기를 나눕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가진 재주가 나와요. 저는 그걸 건드려주는 겁니다. 통신병 시절 순발력을 키운 것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힘드신 적도 많았겠습니다.

“1994년에 6개월 정도 방송을 그만뒀었죠. 건강도 문제였지만 연출가들과 프로그램 진행을 놓고 의견이 달라 많이 다퉜습니다. 저는 국민들이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출가들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동안 만난 연출가만 300여명입니다. 다들 고집이 상당해서 저와 안 다툰 사람이 없어요. 그래도 다툰 뒤에는 꼭 소주를 나눠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다 프로그램 잘되자고 한거니 서로 이해할 수밖에요.”

▶건강은 어떻게 지키십니까.

“따로 운동은 안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지금껏 건강한 것은 일이 있어서일 겁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다릅니다. 사명감이 있으니 에너지가 나올 수밖에요. 여기에 덧붙여서, 노래자랑을 구경하러 오시는 국민들이 주는 에너지가 더 큽니다. 예전에 파라과이 교민들을 찾아갔을 때였어요. 이틀 걸려 도착했더니 온몸이 아프더군요. 그래도 그곳에서 열심히 살고 계신 분들을 보니까 다시 힘이 솟아오르는 겁니다.”

▶요즘 ‘송해 광고’가 화제입니다.

“조준희 기업은행장이 며칠 밤을 고민해 직접 쓴 광고 문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문안을 보자마자 딱 들어오더군요. 기업은행이 기업만 상대하는 곳인 줄 아는 사람이 지금도 많거든요. 국민들이 기업은행에 예금하면 기업이 살고, 일자리가 늘어 더 좋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들이 광고를 보고 기업은행을 찾아 맡긴 예금이 1000억원을 넘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업을 살리자는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 기업들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공헌 활동도 많이 하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1988년에 택시 기사 부부 88쌍에게 3일에 걸쳐 합동결혼식을 올려 준 일이 생각납니다. 택시회사 직원의 절반은 결혼식도 못 올리고 셋방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합동 결혼식 신청을 받았습니다. 당시 독지가들 도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예전보다 돈을 쉽게 벌어서 그런지, 쉽게 쓰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도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일자리 없다고 그러는데, 그거 다 ‘기피성’이라고 봐요. 조금만 힘을 들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힘든 일이라면 일단 안 하려고들 합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아요. 젊은 사람들이 자기 ‘용도’에 맞춰서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여기 낙원동에도 담벼락 밑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들을 보면 멀쩡한 젊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옆 가게에 가서 짐이라도 실어주면 밥은 먹을 수 있잖아요.”


◆ 송해는 누구? 6.25 때 월남…희극인 1세대, 원조 '국민MC'

‘일요일의 남자’ 송해 선생(85)은 한국의 현대 희극인 1세대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본명은 송복희.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단신으로 월남했다. 육군본부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정전(停戰) 소식을 가장 먼저 타전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제대 후인 1955년 ‘창공악극단’ 가수로 문화·예술계에 다시 돌아왔다. 악극단 시절 명콤비였던 고(故) 박시명 씨와 함께 동아방송 라디오 ‘스무고개’에서 활약하며 인기를 얻었다. 1974년부터 17년 동안 KBS 라디오 교통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했다.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구봉서, 배삼룡 씨 등과 함께 활약했다. 1984년 50대 후반에 시작한 KBS ‘전국노래자랑’은 그의 대표 프로그램이다.

그는 지금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초부터 출연한 기업은행 광고는 장·노년층의 발걸음을 기업은행으로 돌리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9월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자신의 첫 단독콘서트를 열었다. 콘서트 실황을 담은 DVD 판매 수익금은 독거 노인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박준동/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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