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惡이 아니라 생존의 토대
러쉬! / 토드 부크홀츠 지음 / 장석훈 옮김 / 청림 / 364쪽 / 1만5000원
경제학은 ‘우울한 학문’으로 알려졌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이런 발상의 계기를 마련해줬고, 리카도와 맬서스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세상에 널리 퍼졌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 즉 시장경제는 조만간 사멸하고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대두하리라는데, 시장경제를 대상으로 하는 경제학이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마르크스 사상의 기초였던 노동가치설을 과학적으로 타파했다는 한계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바탕으로 신고전파 경제학이 탄생한 뒤에도 경제학은 우울한 학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고전파 주장처럼 일반균형이 이뤄진다면 경제는 어떤 성장도 발전도 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소련이 사라진 지금도 여전히 살아남아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학문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으니 말이다. 경제학이란 사회과학으로서 경제현상에서 법칙성을 도출해 성립하는 게 아닌가. 때마침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경제현상을 분석, 시장경제를 옹호한 책이 나왔다. 토드 부크홀츠가 쓴《러쉬!》다.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관념으로는 경쟁에서 벗어나는 게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전제조건이다. 현실적으로도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아를 찾는 게’ 진정한 행복이라고 알려졌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행복 전도사들은 경쟁이 우리의 영혼과 행복 추구의 기회를 삼켜버리는 암적 존재라고 믿는다. 우리가 경쟁에서 발을 떼는 순간, 자기 실현의 기쁨과 희열을 만끽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또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온 세상이 거대한 하비트레일이 되기 전에 말이다. 하비트레일은 햄스터를 키우는 둥근 플라스틱 우리를 말한다.” “고귀함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현대 사회가 아주 빠른 속도로 오염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행복 전도사를 부크홀츠는 ‘에덴주의자’로 몰아붙인다. “행복의 절정이 찾아오는 순간은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때”라는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을 앞세워 비판한다. 또 “초기 인류는 포식자로부터 도망쳐야 할 일이 많았다. 포식자는 때로 짐승이거나 다른 인간이거나 아니면 목숨을 앗아갈 눈폭풍, 호우, 혹은 기근이기도 했다. 인정사정없는 이 지상의 삶과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하려면 다른 인간과 협력해야 했다. 결국 경쟁이 협력을 낳았다. 경쟁은 우리 인류를 비참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토대”라고 주장한다.
부크홀츠의 주장은 우선 신선하다. 주류 경제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다. 비주류인 행동경제학과 진화경제학을 동원해 논리를 전개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주류 경제학의 전제조건인 ‘경제인은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와 ‘경제는 균형을 이룬다’ 등은 현실과 거리가 멀어서 오래 전부터 비판받아왔고,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행동경제학과 진화경제학, 그리고 복잡계 경제학이다.
도대체 누구의 주장이 옳을까. 부크홀츠가 옳을까 아니면 행복 전도사들이 옳을까. 이 문제는 양념과 식량 중에서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서구사회를 경제적 도약으로 이끈 것은 양념이었다. 특히 후추는 한때 금과 같은 가격으로 거래됐을 정도로 고가였고, 후추 등 양념을 거래한 상인들은 큰돈을 벌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양념은 물론이고 비단과 도자기 거래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그 경제적 번영은 서구사회를 중세 암흑시대로부터 탈출시켰다.
그러나 정작 서양이 안정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양념이나 비단이 아니었다. 식량난을 해결해줬던 것은 감자와 옥수수였고, 추위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은 면직물이었다. 특히 면직물은 산업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서양 경제가 동양 경제를 추월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파생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서양을 도약시킨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접근은 ‘우울한 경제학’도 변모시켜 재탄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부크홀츠의 《러쉬!》는 이런 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용식 < 21세기경제학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