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의 정치 명문가들》을 쓴 브루킹스 연구소의 스티븐 헤스와 함께 미국 역사상 최고의 10대 정치 명문가를 선정했다. 여기서 케네디 가에 이어 2위에 오른 가문이 루스벨트 가문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26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32대) 등 대통령 2명과 부통령 1명, 주지사 2명을 배출했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루스벨트 가문을 미국의 정치명문가로 만든 두 수레바퀴인 셈이다.

그 한 축인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에게는 세 명의 조력자가 있었다. 첫 번째로 어머니 사라여사가 꼽힌다. 그런데 사라여사는 프랭클린을 ‘마마보이’로 키웠다. 공부 등 하루 일과는 어머니가 짜준 시간표대로 진행됐고, 평생 취미가 된 우표수집도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했다. 프랭클린이 18세 때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더욱 아들에게 집착했다. 급기야 어머니는 아들이 하버드대에 입학하자 아예 학교 옆에 아파트를 얻어놓고 아들의 생활을 감시하기도 했다. 하버드대 친구들 사이에서 프랭클린은 ‘엄마 품을 잊지 못하는 사나이’라는 별명이 뒤따랐다. 미국 판 맹모지교(孟母之敎 )를 실천한 극성스러운 어머니였던 셈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마마보이’로 키웠지만 독서습관을 유아 때부터 만들어줬다. 세 살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해준 어머니 덕분에 프랭클린은 일생 동안 독서를 즐길 수 있었다. 프랭클린에게 소년시절 해양과 항해와 관련된 책들을 읽게 해준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자주 프랭클린을 외할아버지의 서재로 데려갔는데 거기서 마치 보물 같은 오래된 항해 일지와 보고서들을 읽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미국의 유명한 전략사가인 앨프리드 머핸의 《해상권력사론》을 읽었다. 그가 해양 분야에서는 전문가 수준이었는데 어린 시절 외가에서 접했던 책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윌슨 행정부에서 해군차관보로 임명되었는데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미국인들이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용기와 위로를 준 프랭클린의 ‘노변정담’은 바로 그의 풍부한 독서가 밑바탕이 됐다.

프랭클린이 마마보이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데는 두 명의 조력자가 있었다. 프랭클린은 친척(12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멘토링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프랭클린은 시어도어의 권유로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된 것이다. 프랭클린에게 시어도어는 청소년 시절부터 멘토이자 역할모델이었다. 세 번째 조력자는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다. 프랭클린은 39세 때 찾아온 하반신 마비(소아마비)로 정치생명이 끝난 줄 알았다. 이때 용기를 주고 다시 일어나게 한 이가 엘리너였다. 미국 역사상 처음 4선 대통령(1933~1945년 재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엘리너의 내조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런데 프랭클린이 부인을 처음 만난 곳은 시어도어의 저택이었다. 엘리너 역시 루스벨트 가문 출신으로 시어도어의 친척(조카)이었다.

내조에 힘입어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은 여성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장애인들에게 많은 희망을 가져다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노동부 장관 등 최초로 여성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했다. 더욱이 루스벨트 부부는 재산과 자료를 모두 국가에 헌납해 공익재단인 ‘프랭클린&엘리너 루스벨트 재단’을 설립했는데 지금도 장애인이나 민권운동 등에 기부하거나 후원하고 있는 세계적인 재단으로 꼽힌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