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 재봉기기 업체 브라더공업은 198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미싱 재봉틀 등 재봉기기의 대표주자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수요가 급격히 줄며 브라더는 위기에 빠졌다. 매출이 급격히 줄기 시작한 것. 재봉 기술의 발달과 세탁소의 저가 서비스 확산으로 가정에서 더 이상 재봉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 고객층을 잃은 셈이다.

1908년 설립된 회사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야스이 요시히로(安井義博) 사장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으로 회사를 다시 일으킬 것인지가 화두(話頭)였다. 1991년 야스이 사장은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띄웠다. 팩스였다. 1년 내 399달러(42만원)짜리 저가형 팩스를 개발해 미국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선언했다. 팩스 시장의 잠재력이 크고 브라더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제조업 분야라고 판단한 것. 이 모험은 브라더를 사양산업의 수렁에서 건져냈다.


◆“기업은 우물쭈물하다 망한다”

야스이 사장이 대당 399달러짜리 팩스를 생산하겠다고 하자 회사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당시 미국에서 판매된 저가형 팩스의 가격은 599~699달러 선이었다. 이보다 200달러 이상 싼 제품을 내놓는 것은 무리라는 게 고참 직원들의 생각이었다. 채산성을 맞출 수 없다고 본 것. 마진을 최대한 줄여 가격을 낮춘다고 해도 새로운 회사의 제품을 미국 소비자들이 사줄지 의문이었다.

야스이 사장은 “회사 직원들은 모험을 바라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을 축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직원들은 새로운 사업이 두려웠던 것. 그는 앉아서 망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팩스에 사운을 걸었다. 직접 신사업팀 총괄 책임자를 맡았다.

팀의 모든 직원은 입사 10년차 이하로 구성했다. 머뭇거리는 고참을 배제했다. 전략지역인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서 젊은 직원들의 패기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동시에 재봉산업은 과감히 인력을 줄였다. 재봉 사업 부문 직원 중 절반가량인 1만명을 감원하거나 다른 부서로 재배치했다.

저가형 팩스 생산을 위해서는 고품질의 부품을 저가로 제공해줄 협력업체가 필요했다. 야스이 사장은 직접 협력업체를 찾아 나섰다. 원가를 한 푼이라도 줄일 수 있는 업체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갔다. 수십년간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협력업체들도 큰 도움이 됐다. 그 결과 팩스에 장착된 종이절단기의 가격을 절반으로 낮췄다. 다른 부품도 일반 제품보다 20~30% 낮췄다.

◆‘고품질 병’을 넘어서다

브라더의 첫 팩스인 ‘팩스 600’은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출시 한 달 만에 20만대가 팔렸다. 재고는 동이 났다.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라는 높은 신뢰도도 도움이 됐다. 야스이 사장은 “미국 소비자들이 처음에는 브라더가 재봉틀이 팔리지 않자 팩스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비꼬았지만, 품질을 인정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브라더는 팩스 600의 성공으로 변신의 돌파구를 찾았다. 재봉틀에서 정보통신기기로 주력 제품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팩스 성공을 발판으로 레이저 프린터, 디지털 복합기 등의 제품을 계속 내놨다. 가격전략은 팩스와 같았다. 일반 상품에 비해 30%가량 싼 제품을 내놓은 것. 야스이 사장은 “우리의 타깃은 주로 중소기업이었으며 가격은 싸지만 품질 좋고 서비스는 철저하다는 것을 보여준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야스이 사장은 도요타자동차, 캐논의 경영자들처럼 기업 가치를 높였다”고 평가했다.

야스이 사장은 일본 기업들이 갖고 있던 고질병 두 가지를 극복함으로써 브라더의 부활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과도한 품질에 대한 집착이다. 일본 제조업체들은 가격이 높아지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집착했다. 반면 적당한 가격, 적당한 품질의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들도 많았다. 이 불일치 때문에 1980년대 세계 시장을 휩쓸었던 일본 D램 반도체 업체들은 궤멸했다.

그는 또 과거의 화려함과 결별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 시장을 석권한 재봉기기 사업을 과감히 버린 것이다. 기술력과 한 우물 파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본 기업들의 문화와 다른 점이었다.

◆통신기기업체로 부활

야스이 사장은 1938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게이오대 공학부를 졸업한 그는 23세 때 아버지가 창업한 일본미싱제조(현 브라더공업)에 입사했다. 야스이 사장은 직접 가정용 재봉틀의 핵심 기술인 ‘셔틀 훅’을 업계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이 기술은 브라더가 일본 최고 재봉기계 업체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61년 휴대용 타자기도 시장에 내놓는 모험을 하기도 했다.

그의 별명은 ‘코뿔소’다. 한번 결심한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근성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는 “한때 재봉업체로 인정받고 수익도 나쁘지 않았지만 야스이 사장은 끊임없이 변화를 꾀했다”며 “그가 없었다면 브라더공업은 이미 문닫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야스이 사장은 “정보통신기기 제조업체로의 변신은 사실상 창업이나 다름없었다”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다.

브라더는 2010년 흑백 레이저 복합기 시장에서 삼성, 캐논, HP에 이어 세계 4위에 올랐다. 3위 HP와의 시장 점유율 차이는 0.76%포인트에 불과했다. 작년 브라더의 전체 매출 중 76.5%가 프린터·복합기 등 전자 관련 부문에서 나왔다. 가정용·공업용 재봉기 부문 매출은 매년 줄어 13%에 불과하다. 야스이는 새로운 제품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최근 자동 양면 인쇄와 무선 네트워킹을 지원하는 컬러 잉크젯 복합기 ‘MFC-J5910DW’를 출시했다. “싸게 만들어 판다”는 철학은 지금도 여전하다. 기존 복합기의 절반 수준인 3만엔에 팔고 있다.

야스이 사장의 강력한 리더십은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 2010년 매출액과 영업이익에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매출은 5020억엔으로 2009년에 비해 12.7%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5.5% 증가한 360억엔을 기록했다. 금융위기도, 일본 전자산업의 쇠락도 브라더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야스이 사장은 지금도 “묵은 것은 버리고 돈이 될 새로운 사업을 계속 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2015년까지 매출을 두 배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밝혔다. 브라더는 현재 전 세계 44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전체 직원은 2만3000명에 이른다.

장성호 기자 jas@hankyung.com


◆야스이 요시히로 약력

▲1938년 일본 나고야시 출생▲1961년 게이오대 공학부 졸업▲1962년 브라더공업 입사▲1974년 브라더공업 개발부장▲1983년 전무▲1989년 사장 취임▲1991년 팩스기계 ‘팩스 600’ 개발 미국에서 판매▲2010년 일본 경제산업상 표창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