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불황 유럽서 현대·기아차 '질주' 이유
유럽 대륙에 경기 침체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재정위기의 터널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고 소비심리는 극도로 오그라든 상태다. 대표적인 내구소비재인 자동차 수요도 꽁꽁 얼었다. 새 차를 사려고 마음 먹었던 소비자들도 다시 지갑을 닫고 있다.

자동차 회사들은 재고 때문에 골치다. 최근 유럽현장을 방문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공급과잉이 유럽시장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했다. 업계가 추산하는 공급과잉 비율은 20%에 이른다. “이대로 가면 공멸한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공장 폐쇄 등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불황에 짓눌린 GM과 포드, 푸조·시트로앵, 르노 등에 현대차와 기아차는 ‘부러운 존재’다. 시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현대·기아차의 생산과 판매는 계속 늘어나고 시장점유율도 확대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럽 자동차판매는 전년보다 1.4% 감소했지만 현대·기아차는 11.6% 늘었다. 지난 1월 유럽시장 수요가 전년 동월 대비 6% 줄었지만 현대차는 17% 성장했다. 기아차는 1월 30%, 2월 31%의 성장세를 보였다. 현대·기아차가 경제위기에 처한 유럽에서 잘나가는 이유는 뭘까?

◆비밀은 ‘품질+α’에 있다

기본은 품질이다. 그러나 동급 경쟁차종보다 월등하다고 할 수 없다. 핵심은 가격이다. 비슷한 품질의 차를 5~10%가량 저렴하게 팔고 있다. 경기 침체기에 고객들은 작은 가격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불황 국면에서 현대·기아차가 질주하는 이유다.

앨런 러시포드 현대차유럽법인 부사장은 지난 7일 제네바모터쇼 기자회견에서 “현대차는 과거에 프리미엄 고가 차에 장착됐던 고연비와 저(低)배출가스 엔진을 양산 모델에 적용했고, 그것도 경쟁차종보다 낮은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현대차는 가격대비 가치와 품질, 저(低)배출가스 등 유럽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특징을 모두 갖췄다”고 했다.

◆규모의 경제와 외곽 생산기지

그렇다면 5~10% 싼 가격은 어떻게 가능할까. 밑지고 파는 것은 아니다. 현대·기아차의 가격경쟁력은 우선 생산기지에서 나온다.

현대·기아차는 유럽시장의 심장부 서유럽이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등 외곽에 공장을 두고 있다. 이곳은 근로자 임금이 서유럽보다 20% 이상 싸다. 현대차의 체코 노소비체 공장에서 기아차 슬로바키아 질리나 공장까지 거리는 80. 양사는 플랫폼을 공유하는 모델이 많다. 부품 조달 등에서 시너지 효과를 누린다.

임종원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은 현대차의 미 앨라배마공장 건설경험을 살려 미국보다 더 완벽하게 건설했다”며 “포드유럽이나 폭스바겐 등 경쟁업체보다 뛰어난 품질경쟁력과 원가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자동차는 통상 생산규모가 두 배가 되면 15% 정도 원가가 절감된다. 연산 30만대 규모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 원가는 10만대 공장 제품보다 10~20% 낮다. 체코공장과 슬로바키아공장의 생산능력은 똑같이 30만대로 지난해 25만대씩 생산했다. 올해는 풀가동 중이다. 폴란드의 스코다 공장(13만대)과 GM 오펠공장(10만대), 슬로바키아 폭스바겐공장(10만대)에 비해 원가경쟁력에서 앞선다.

◆공격적 마케팅, 그리고 FTA 효과

현대·기아차가 지난해 유럽판매에서 판매한 차량 69만대 가운데 27%(19만대)는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한 것이다. 유럽 수출은 2010년(11만대)보다 74% 급증했고 관세장벽을 낮춘 한· EU 자유무역협정(FTA) 효과가 컸다.

작년 7월부터 한국산 차량의 EU 관세는 종전 10%에서 8.3%(배기량 1500cc 이하)와 7%(1500cc 초과)로 낮아졌다. 오는 7월부터는 각각 6%와 4%로 한 단계 더 낮아진다. 관세인하는 곧 판매가격 인하를 의미한다. 가격경쟁력의 또 다른 배경이다. 유럽 자동차업계는 최근 “한·EU FTA는 불공정하다”며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다.

현대차는 작년 하반기 유로존 위기가 심화되자 최대 격전지인 독일과 프랑스의 딜러망을 직영체제로 바꿨다. 공격적인 마케팅을 위해서였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라’는 정몽구 회장의 역발상 전략에 따른 것이다. 그 결과 지난 1~2월 독일과 프랑스의 판매량이 전년 대비 각각 19%와 4% 증가했다. 이 밖에 품질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현대차는 5년, 기아차 7년의 무상보증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고객충성도를 높이고 있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러시 포드 부사장은 “현대차는 지금 GM 오펠, 폭스바겐, 르노의 시장을 빼앗아오고 있다”며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아우디 등이 장악하고 있는 프리미엄 마켓에선 아직 갈길이 멀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은 최근 중소형 모델을 잇따라 개발, 현대차가 집중공략하고 있는 매스(mass) 마켓을 파고들고 있다. 일본차의 반격도 변수다. 대지진 이후 공급차질을 빚었던 닛산 도요타 혼다 등이 유럽생산 및 판매를 본격화하고 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