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울산 남구 달동의 한 무허가 건물에 66㎡(약 20평) 남짓한 규모의 화력발전소 설비를 보수하는 작은 업체가 문을 열었다. 선반과 사무집기가 놓인 사무실은 단 2명뿐인 직원이 일을 하기도 비좁았다. 당시 이 업체가 울산화력발전소에서 첫 수주받은 금액은 24만원. 첫 매출 24만원으로 출발한 이 업체는 불과 20여년 만에 매출 1300억원 규모의 중견기업으로 변신했다. 바로 이 회사가 2009년 말 한국형 원전의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을 성공적으로 이끈 일진에너지(회장 이상업)다.

일진에너지는 UAE에 수출될 3세대 원전이 진도 8.0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가상 실험을 통해 입증하는 ‘가압경수로 열수력 종합효과 실험장치’인 아틀라스(ATLAS)를 제작했다. 원자력 분야에서 이처럼 두각을 낼 수 있었던데는 창업 이래 화공기기 제작과 터빈 · 발전기 등 발전정비 분야에서 쌓아온 높은 기술력과 노하우 덕분이다.

일진에너지는 작년 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플랜트 시장 전망이 어두운데도 온산공단에 3만3000㎡ 규모의 화공플랜트 기자재 전용 공장을 준공한 것이다. 사업비만 200억원에 이른다. 이로써 본사 등을 합해 전체 부지면적 7만3000㎡의 생산기지를 구축했다. 플랜트 제작설비에서 사후 유지 보수까지 가능한 첨단 일관시스템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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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는 2002년 하동화력발전소를 시작으로 현재 당진, 울산, 일산열병합, 평택 등 모두 6개 화력발전소의 정비 공사를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쌓인 기술력을 기반으로 민간기업 최초로 신고리 원전의 정비 사업을 수주했다. 회사 측은 “국내 발전정비시장 규모만 2조원으로 추정된다”며 “2013년 국내 발전정비 시장의 전면 개방을 앞두고 경쟁우위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태양전지 핵심 기자재인 잉곳(Ingot)생산장비인 ‘그로잉 머신(단결정 성장장치)’ 생산능력이 연간 500여대에 이르는 등 태양광 분야에서도 성장기반을 다지고 있다. 태양광용 폴리실리콘 제조공정에서 버려지는 수소를 회수, 재활용하는 장치도 개발해 태양광뿐만 아니라 초고순도의 수소가 사용되는 LED산업 등 다양한 분야로의 상용화에 발빠르게 나서고 있다.

원자력 부문에서는 전력 생산과 해수 담수화가 동시에 가능한 중소형 원자로 개발사업 모델인 ‘스마트(SMART)’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동안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추진하는 스마트 중소형 원자로 사업에 들어가는 주요 기계장치의 설계와 성능시험의 70% 이상을 수주하면서 폭넓은 경험과 기술력을 축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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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만 참여해온 스마트 원자로 컨소시엄에 중소기업 참여 지분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했다. 국제시험용융합원자로(ITER) 사업도 애착을 갖는 분야다. 이미 삼중수소 취급 기술을 바탕으로 캐나다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삼중수소 저장장치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를 월성원자력 발전소에 성공적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회사 측은 “세계적으로 에너지난이 심화되고 있는 만큼 스마트사업과 ITER사업이 본격화되면 매출 1조원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것도 머지않았다”고 자신했다.

◆ 박건종 일진에너지 사장 "품질 자신감…저가 수주 안해, 올 중동·남미 집중 공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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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수주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일진에너지 박건종 사장(사진)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선별 수주를 통해 불황을 극복해왔다”며 “철저한 원가관리와 정도 경영이 일진에너지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이어 유럽발 경기침체로 국내 플랜트 기자재 업계가 거의 대부분 경영위기를 맞고 있지만 그가 이렇게 자신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달 31일 작년 말 새로 준공된 3만여㎡ 규모의 온산공장에 들어서자 공장은 비좁을 정도로 초대형 화공기기 수주물량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박 사장은 “기술개발과 품질향상, 납기일 내 맞춤형 공급 등으로 거래처에 100% 신뢰를 준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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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해 일본의 JGC, 히타치,지요다 등 세계적인 플랜트 엔지니어링 업체들과 협력업체 등록을 맺고 공격적인 시장개척에 나서 750억원대의 사상 최대 수주실적을 거뒀다. 올해도 수주가 낙관적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의 시설도 대부분 40년 이상으로 낙후돼 시설 교체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박 사장은 올해 중동과 남미시장을 중점 공략할 계획이다. 수주제품도 석유화학, LNG, 정유, 발전 설비 플랜트 분야의 초대형 열교환기(Heat Exchanger)와 베셀(Vessel)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박 사장은 “지난 20여년 동안 일진에너지가 원전과 태양광 등에서 쌓아온 높은 기술력과 노하우를 화공기기와 융화합시켜 올해를 새로운 도약을 열어가는 한 해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울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