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홍화문 밖서 백성 만난 까닭은
요즘처럼 ‘소통’의 중요성이 부각된 적도 없는 듯하다. 정치권의 국민과 소통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전통시대에도 백성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가진 왕이 있었다. 영조(1694~1776)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영조는 왕이 되기 전에 궁궐 밖에서 생활했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창의궁은 영조의 잠저로서, 젊은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백성들의 생활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영조는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백성을 위한 정책 수립에 골몰했다. 당시 가장 큰 사회문제였던 백성들의 군역 부담 해결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1750년(영조 26) 5월19일 영조는 군역 부담에 대한 백성들의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밖으로 나섰다. 당시 영조와 신하, 백성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살펴보자.

‘임금이 홍화문에 나아가 사서인(士庶人)을 불러서 양역(良役)에 대해 물었다. 임금이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에게 말하기를 “이윤(伊尹)이 이른바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내가 밀쳐서 구렁에 떨어뜨린 것과 같다’고 했는데, 바로 내 마음을 이른 말이다”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너희들의 고질적인 폐단은 양역보다 더함이 없기 때문에 궐문에 임하여 묻게 된 것이다. 유포(遊布)와 구포(口布)는 당초에 논하고도 싶지 않으니, 호포(戶布)와 결포(結布)로써 너희들의 소원 여부를 듣고자 한다. 반경(盤庚·《서경》의 편명) 세 편은 모두 백성에게 하유(下諭)하는 글이다. 나도 지금 백성들에게 하유하노니 각자 소견을 말하라”하고, 윤음을 받아 적으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아! 이번에 궐문에 임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한 연유에서다. 우리 사서(士庶)들은 모두 이 하유를 들으라. 생각해 보면 지금의 민폐는 양역 같음이 없으니, 지금에 이르러 고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느 지경에 이르러 탈가(稅駕·수레를 풀고 휴식을 취함)될지 모르는 일이다.”

양역(良役)은 16세부터 60세까지 양인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서 내는 세금이다. 포목(군포)을 내는 것이었지만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 친척, 이웃의 군포까지도 부담하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이 끊이지 않았다.

영조는 홍화문에서 백성들을 불러 양역에 대해 의견을 물으면서 고질적인 양역의 폐단을 꼭 고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어 호포, 결포, 유포 등 군역 부담의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며 백성들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한더위를 정양(靜養)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병을 무릅쓰고 문에 임하여 사서(士庶)를 불러 물어보는 것이다. 예부터 폐단을 구하려 하는 자는 호포(戶布)니 결포(結布)니 유포(遊布)니 구전(口錢)이니 하고 말하는데, 구전은 일이 매우 보잘것없고 유포 역시 매우 불편하니, 이 두 가지는 나의 뜻이 결코 시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지금 묻고 있는 것은 호포와 결포 및 이 밖에 좋게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도인 것이다.”

영조는 군역 부담을 경감시키는 균역법 시행에 앞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널리 구했다. 이후에도 양인들의 군역에 관한 절목(節目) 등을 검토하고, 7월에는 양역에 관해 유생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등 적극적인 여론조사와 양역의 개선 방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한 끝에 이해 7월11일 전의감(典醫監)에 청(廳)을 만들어 균역청(均役廳)이라 이름하고 예조 판서 신만(申晩), 이조 판서 김상로(金尙魯), 사직 조영국(趙榮國)·홍계희(洪啓禧)를 당상으로 삼았다.

균역청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균역법을 실시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균역법의 주요 내용은 1년에 백성들이 부담하는 군포 2필을 1필로 납부하게 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반값 군포’를 실현한 것이었다.

균역법의 실시로 국가의 재정 부담이 커지자 영조는 부족한 재원 마련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일정한 직업이 없이 놀고 있는 재력가들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명목으로 군포를 내게 했다.

이들은 양반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호적에 유학(幼學)이라고 칭하던 자들로서 종래에는 군역을 부담하지 않던 계층이었다. 조선후기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층들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칭을 주는 대신에 군포를 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이외에 결작(結作)이라는 새로운 세금을 신설해 지주들에게 1결당 쌀 2말이나 5전의 돈을 부담하는 토지세를 만들어 땅이 많은 양반 지주들의 부담을 크게 했고, 왕실의 재원으로 활용했던 어세, 염세, 선세(船稅)를 군사재정으로 충당해 균역법의 실시에 따른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했다.

결국 균역법의 실시는 백성들의 부담은 줄어들게 하는 대신 양반층, 특히 땅이 많은 지주들의 부담을 크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백성들과 소통하면서 균역법이라는 국가 정책을 실천한 영조의 모습이 결코 옛일로만 느껴지지 않는 시대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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