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은 31세에 차관이 된 후 34세부터 상무부 장관을 시작으로 내무부 해군부 군수부 육군부 식민부 재무부 등 6개 부처의 장관을 지냈다. 그렇지만 50대에 접어들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는 1924년 50세에 재무장관에 올랐지만 인도 자치령 승인 문제를 둘러싸고 볼드윈 총리와 대립하면서 1929년 물러나게 된다. 심지어 자유당과 보수당 양쪽으로부터 '위험인물'로 간주돼 정치적으로 큰 불신을 사기에 이른다.
처칠은 점증하는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 영국의 재무장을 주창했으나 체임벌린 내각으로부터 무시당했다. 결국 1930년부터 1939년 해군부 장관에 복귀하기까지 10년 동안 정계를 떠나 야인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정계를 떠난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지를 가꾸면서 전원생활을 했다. 정계에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10년 동안 자신의 내공을 쌓으며 충전기로 삼았다. 로마의 몰락 과정을 다룬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또 읽었다.
"로마의 쇠퇴는 제국의 거대함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번영이 쇠퇴의 원리를 무르익게 한 것이다. 정복지역이 확대되면서 파멸의 원인도 증가했다. 그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위적인 기둥이 제거되자마자 이 거대한 건축물은 자체의 무게 때문에 무너졌다. "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위기에 처한 대영제국을 생각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쇠망사》는 그의 아버지의 필독서였다. 그는 아버지가 어느 페이지에 어떤 문장이 있는지까지 암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무장관을 지낸 아버지는 연설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이 책을 참고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흉내내며 성장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는 옛말은 처칠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아버지가 즐겨 읽었던 기번의 책을 그는 22세부터 읽기 시작해 그 이야기와 문장의 포로가 됐고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멀리 되돌아볼수록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다. " 처칠이 남긴 명언 중 하나로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역사와 전기 책을 좋아했던 그는 로마사 등에서 수많은 사례를 접해 누구보다 역사적 상상력이 풍부했는데 위기를 수습한 명재상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이는 글쓰기로 이어져 《제2차세계대전》(6권)을 낳았고 그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까지 안겨줬다.
그는 '아버지의 필독서'를 위대한 유산으로 물려받은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문필가이자 명재상으로 우뚝 섰고 가문을 빛냈으며 세계사적으로 평화의 파수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은 독일의 침공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할 파수꾼으로 다시 처칠을 찾았고 10년의 기다림 끝에 그는 1940년 66세에 총리에 올랐다. 이어 77세에 다시 총리에 취임했다. 명가의 화려한 부활이었다.
처칠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기다림으로 다져진 내공'이야말로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