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모씨는 1987년 경기도 파주의 임야 4만1330㎡를 이모씨에게 2억4000만원에 팔았다. 18년가량이 흘러 땅값이 100억원대로 오르자 인씨는 땅의 일부를 돌려받고 싶어졌다. 이씨는 1994년 사망해 해당 토지는 두 아들이 50% 지분씩 물려받은 상황이었다.

인씨는 "이씨가 매입대금을 다 지급하지 못해 땅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자필 글에 과거 이씨가 자신에게 보낸 내용증명에 찍힌 이씨의 막도장을 위조해 찍었다. 여기에다 입회 보증인으로 내세운 공범의 도장을 함께 찍는 방법으로 1992년에 작성된 것처럼 꾸민 허위 합의각서를 작성했다. 이를 근거로 2007년 4월 이씨의 두 아들에 대해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냈다.

재판 과정에서는 사설 업체가 문서감정을 맡았다. 이 업체는 "1992년에 문서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감정결과를 보냈고,법원은 이에 따라 인씨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이씨의 두 아들은 "인씨가 문서를 위조했다"며 경찰에 고소했지만 경찰도 법원 판결 등을 이유로 검찰에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했다.

그러나 사건 기록을 본 서울남부지검의 윤진용 검사는 수상한 점을 느꼈다. 매매계약서에서는 이씨가 인감도장을 찍었는데 합의각서에는 막도장이 찍혔고,인씨가 이씨 사망 후 13년이 지나서야 소송을 낸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윤 검사는 입회보증인으로 참가했다는 김모씨로부터 "인씨의 요청으로 2006년 백지에 서명날인을 해준 적이 있다"는 증언을 받았다.

합의각서에는 김씨 것 위에 찍힌 또 다른 입회보증인 장모씨의 도장 자국과 김씨의 서명이 겹쳐 있었다. 인씨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입회보증인들이 서명날인했다고 주장했으나,윤 검사는 인씨가 백지에 먼저 김씨의 서명날인을 받은 뒤 거짓 합의각서를 작성했고 그 이후 다른 입회보증인의 서명날인을 받았을 것으로 봤다.

윤 검사는 대검찰청 문서감정실에 감정을 의뢰했다. 감정 결과 인씨의 주장과 달리 장씨가 김씨의 서명 위에 도장을 찍은 것으로 판명됐다. 도장과 서명이 겹쳐졌는데도 볼펜 잉크와 인주가 모두 묻지 않은 부분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윤영미 감정관은 "볼펜 끝이 날카로워 종이에 잉크가 일부 묻지 않은 요철이 생기는데 그 위에 도장이 찍혀져 인주가 요철에도 묻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윤 검사는 이를 근거로 인씨를 사문서 위조와 위증 등 혐의로 기소했다.

윤 감정관은 "사설 감정업체에서는 재판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느 한쪽에 유리하게 문서를 감정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검 과학수사기획관 산하에는 석 · 박사급 감정관 100여명이 근무 중이다. 문서감정실은 필적 · 인영(印影) · 지문 · 지질(紙質) · 잉크 성분의 동일성 여부,기재 시기,불선명 문자,필흔 재생 여부 등을 분석해 문서의 위 · 변조와 작성 시기,내용을 판독한다.

과거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는 무통장입금확인서에 나타난 필적을 감정해 연구원 명의로 된 통장이 황 전 교수의 차명계좌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