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영 한국제지 이사(41 · 사진)는 꼭두새벽에 생산현장에서 걸려온 당직자의 비상호출을 받고 곧바로 출동했다. 울산기상대 관측 이래 80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남 이사는 "부공장장 직을 맡은 뒤 비상호출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얼굴도 씻지 않은 채 회사로 달려갔다"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비상호출이 잦아지자 남 이사는 아예 밤샘근무를 했다. 남자직원들과 함께 공장 이곳저곳에 쌓인 눈을 직접 치웠다. 남편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같은 억척스러움을 지켜본 회사는 부공장장이 된 지 3개월도 안된 그를 이사로 선임했다. 파격인사였다. 제지업계 여성 임원은 남 이사가 처음이다. 입사 동기인 다른 남자 동료들도 제쳤다.
남 이사는 "1년여 동안 공석으로 있던 부공장장 자리를 맡게 된 것만 해도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 이사로 선임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제지업계 첫 여성 임원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업무 혁신과 조직 융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강원대 제지공학과 1회 졸업생이다. 학부는 물론 대학원에서 제지공학 박사학위까지 땄다. 1995년 한국제지 연구원으로 입사한 뒤 15년 동안 인쇄용지 품질 개선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거뒀다. 물에 잘 견뎌야 하는 맥주와 소주 라벨지의 품질을 혁신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4년에는 미국과 호주에서 최고급 친환경 인쇄용지로 인정받은 프리미엄 아트지를 만들어 냈다.
2006년 남 이사가 개발한 복사지 '하이퍼CC'는 태국 중국 등 외국 제품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남 이사는 이를 기반으로 수입 컬러 전용지와 품질은 같지만 가격을 절반 이상 낮춘 보급형 컬러 프린트지 '하이퍼CC 프로'와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미색 복사지 '하이퍼CC 미색',레이저 전용지 등도 잇따라 개발했다.
남 이사의 연구 개발 성과는 당시 대대적인 설비 투자로 영업 적자를 냈던 회사 손익을 흑자로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400여명에 이르는 온산공장 전체 직원의 생일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탁월한 친화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가 부공장장이 된 뒤 공장 내부 바닥은 티끌 한점 찾아내기 힘들 만큼 깨끗해졌다. 함께 일하는 서승석 온산공장장은 "이산화탄소를 공정에 재활용하는 등 탄소 제로화를 실현하고 있는 한국제지 브랜드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순백색 공장 경영인"이라며 남 이사를 치켜세웠다.
울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