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한국은 아직도 중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덜한 나라로 평가받지만,이탈리아에서 만큼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단번에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에 미쳐 있는' 이탈리아에 한국은 꽤 깊은 '악연'을 가진 나라다.

악연의 역사는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 열린 런던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상대한 나라는 'North Korea'였다. 북한은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침몰시켰고,이에 격분한 이탈리아 축구팬들은 귀국하는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들에게 토마토 세례를 퍼부으며 울분을 터뜨렸다. 두 번째 악연은 잘 알다시피 2002년 한 · 일 월드컵 16강전에서였다. 연장 접전 끝에 안정환 선수의 천금 같은 결승골로 또 다시 한국에 무릎을 꿇은 이탈리아는 망연자실했고,두 '한국'과의 악연에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팀의 '붉은악마' 응원단은 'Again 1966'이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응원을 펼치면서 이탈리아인들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게다가 경기 후 이천수 선수가 이탈리아 말디니 선수의 뒤통수를 일부러 발로 찼다고 고백하면서 이탈리아 축구팬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흥분의 중심에 있던 것은 'Again 1966'도,이천수 선수의 '고백'도 아니었다. 그것은 에콰도르 출신 심판 바이런 모레노였다. 모레노 심판은 그 유명한 표정을 지으며 이탈리아의 축구영웅 토티 선수를 퇴장시켰고,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토티의 퇴장으로 이탈리아팀의 경기력은 급격히 저하됐다.

아직도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2002년 한국-이탈리아전이 주심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승리를 빼앗긴 경기'라고 평가하고 있고,덩달아 한국에 대해서도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모레노 주심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해묵은 감정은 대회가 끝난 지 8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작년 9월 모레노 심판이 뉴욕 공항에서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되자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이 앞다퉈 보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기업과 거래하는 한국기업들에도 '2002년 월드컵'은 일종의 금기가 된지 오래다. 이탈리아 기업과 거래를 앞둔 한 한국 기업은 최종 계약서 서명을 앞두고 가진 식사 자리에서 서로가 관심 있을 법한 축구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가 2002년 월드컵으로 이야기가 번지는 바람에 서로 간에 감정이 상해 거래가 무산된 사례도 있다.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 만국 공통언어로 서로 간의 벽을 허무는 데 유용한 축구는 비즈니스에서도 종종 애용되는 소재지만,이탈리아 기업과 거래할 때만큼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꼽힌다. 그래도 악연이든 인연이든 축구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한국의 위상만큼은 지구상 어디보다 공고하니,이 또한 축구가 가진 마력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발전하는 양국 관계처럼 양국의 축구 역사도 쳐다만 봐도 흐뭇한 일들로 가득 채워져 나가기를 바란다.

이종건 < KOTRA 밀라노 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