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체,휴고보스,에르메스….글로벌 명품으로 꼽히는 이들 브랜드에 '불량품'이란 낙인이 찍혔다. 중국 저장성 정부는 지난달 30개 수입 의류 샘플 85개를 조사한 결과 48개가 중국의 품질 기준도 충족하지 못했다며 "해외 브랜드에 대한 중국 소비자들의 맹목적 숭배가 잘못됐음을 또다시 입증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해외 브랜드가 공격받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쯔진청(紫禁城)에 '감히' 간판을 내건 스타벅스는 입점 7년 만인 2007년 쫓겨났다. 베이징 올림픽 때 티베트 인권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했던 프랑스 까르푸는 불매 운동의 역풍을 맞았다. 중국의 어린이날인 '얼퉁제'(6월1일)에는 매년 KFC 등 해외 패스트 푸드가 '정크 푸드'를 아이들에게 판다며 공격을 받는다. 인터넷엔 KFC가 다리 3~4개 달린 닭을 키운다는 괴담도 떠돈다.

박재우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에 핍박받아온 중국에는 외국 기업 배타심리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곽복선 KOTRA 중국조사담당관은 "중국에는 외자기업 때문에 민족 기업이 못 컸다는 인식이 있다"며 "민족주의가 외자기업들의 생존 문제이기도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신(新) 차이나 리스크

"중국 소비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수리보장 기간을 연장하겠다. " 미국 PC 제조업체인 휴렛팩커드(HP)가 지난달 발표한 성명서 내용이다. "HP가 2003년 이후 해외 시장에서 많은 제품을 리콜했지만 중국에서는 단 한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왕위펑 베이징 잉커로펌 변호사)는 것을 깨달은 소비자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서둘러 머리를 숙인 것.

중국 소비자들에게 차별대우를 하다 곤욕을 치른 것은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도요타는 리콜을 하는 경우 소비자들에게 교통비로 300위안씩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리콜이 발생하면 미국과 달리 중국 소비자들은 대리점에 직접 차를 갖고 가야 하고 교통비도 받지 못한다"(정위 저장성 공상국장)는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중국의 민족주의가 외자기업에 새로운 리스크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일본 외식 체인점 요시노야도 닭가슴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를 새긴 광고를 방영,중국 국기를 모욕했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맥도날드는 한 중국인이 무릎을 꿇고 맥도날드 점장에게 가격을 깎아 달라고 조르는 내용의 TV 광고를 내보낸 뒤 "중국인 소비자를 모욕했다"는 비난이 들끓자 1주일도 안돼 광고를 내렸다. 김명신 KOTRA 중국통상전략센터 연구위원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문구나 역사적 또는 문화적 금기사항을 건드리지 않도록 현지 마케팅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격까지 통제

중국 정부는 지난 2월 외국 제약사들로부터 가격결정권을 거둬들였다. 중국 기업에 생산 라이선스를 줄 때 정부가 정한 가격을 준수하도록 한 것.중국 제약산업을 주도하는 중국 국영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다.

미국 로펌인 윌머할레 베이징사무소의 레스터 로스 파트너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중국에선 더욱 보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풍력터빈,태양광 패널과 같은 대형 신에너지 프로젝트에 외국산의 공급이 막혀 있는 걸 사례로 들었다.

"중국 시장의 파이가 커지고 있지만 문은 더 좁아지고 있다"(외르크 부트케 주중국 EU상공회의소 회장)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북미 유럽 아시아 지역 34개 비즈니스 단체는 작년 말 중국 상무부 등 3개 기관에 외국 기업에 대한 차별 대우를 시정해 달라고 공식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이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 필요로 인해 대중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정책이 필연적으로 창출될 것"(복거일의 저서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이라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안 부루마 미국 바드대 교수는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일당 지배만이 중국의 부상을 지속할 수 있고,굴욕의 역사를 끝낼 수 있다는 민족주의를 부각시켜 왔다"며 "강대국 중국의 앞날을 의심하는 것은 반(反)중국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화 민족주의의 역풍

지난 1월 도쿄에서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장관)과 마주한 오카다 가쓰야 일본 외상은 동중국해의 춘샤오에서 중국이 가스전 개발을 강행하는 것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오카다 외상은 국제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는 방침까지 전달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중국과 일본이 2008년 춘샤오 가스전 공동 개발에 합의했는데도 분쟁이 계속되는 것은 중국 네티즌이 정부가 너무 양보했다면서 불만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극단적인 민족주의 열정에서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정부도 막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중국 공산당은 민족주의를 활용하고 있지만,되레 이것이 중국 지도자의 활동 반경을 제약한다"(제프리 와서스트롬 미국 어바인대 교수)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이나 위안화 절상 압박에 중국 정부가 강한 반발을 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접근하는 국민들을 염두에 둔 '계산된 방어'라는 측면도 있다는 설명이다. 부트케 회장은 "인터넷에서 민족주의 확산이 중국을 더욱 보호주의적이고 외국 기업에 적대적으로 만든다"며 "유럽에서 역풍(중국산 규제)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 교수는 저서 '제국의 미래'에서 "중국은 뿌리 깊은 외국인 혐오와 민족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관용의 정신을 배우지 못한 탓에 진정한 강대국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질타한다. 중국의 민족주의는 중국의 단결을 이루는 촉매인 동시에 진정한 중화부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