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전지를 생산하는 A사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정부 기관의 중복 검사로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부담하고 있다. 설계 단계에서 가스안전공사에서 70개 항목의 '법정검사'를 받는데,이를 통과하면 에너지관리공단의 '설비인증'(51개 항목)이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이 가운데 무려 43개 검사 항목이 겹친다는 것.A사 관계자는 "비용이 각각 1200만원,1400만원인데 1000만원은 그냥 날리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두 기관의 인증업무 운영 규정을 개정하도록 해 내년 상반기부터는 가스안전공사에서 통과한 항목을 에너지관리공단에서도 인정해주기로 했다.

9일 정부가 발표한 '기술규제 개선 방안'은 기업의 기술개발과 활용에 지장을 주고 있는 직 · 간접적인 규제를 현실에 맞게 고쳐 글로벌 기술 경쟁력을 높이는 게 핵심 내용이다.

◆숨은 규제,재량권 과다 심각

정부의 의뢰로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48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업의 33.4%는 '숨은 기술 규제 및 과다한 재량권'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규제 권한을 갖고 있는 중앙정부,지자체,관리기관 가운데 특히 관리기관의 준(準)법규적 기술 규제가 가장 기업활동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실제로 H사는 상수도보호구역에서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한 허가 절차를 밟으면서 유권해석을 요청했는데 기관마다 다른 해석을 내려 애로를 겪었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또 '과도하거나 중복적인 서류제출 요구'(39.5%),'복수의 소관기관 상대'(8.9%) 등도 기술개발 의욕을 꺾고 기업가 정신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기업의 혁신 속도에 기술 규제가 따라가지 못하는 데 따른 문제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B사의 경우 화재시 여러 명이 손쉽게 대피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형 무동력 피난기구를 개발했지만 소방법령상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도 제품화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기술 규제는 기업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킨다. 대기업은 연간 평균 246억원을,중견기업은 평균 19억원을 기술제도 관련 행정절차에 지출하고 있었으며,불합리한 기술 규제를 거치는 데도 평균 17개월이나 걸렸다.

◆발목 잡는 규제 100여건 먼저 고치기로

지식경제부 주도로 18개 부처의 94개 법령을 전수조사한 결과 기술 규제로 볼 수 있는 조항이 4400여건에 달했다. 이날 회의에서 지경부는 △신기술 인증제도 통합 △병역특례 인력 배정시 녹색 분야 우대 △실패한 벤처기업인의 재기 지원 등 13개 사례를 내년부터 우선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별도로 운영 중인 보건신기술(보건복지가족부)과 전력신기술(지경부)을 내년 8월까지 'NET(신기술인증)'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NET는 기업,연구기관,대학 등이 개발한 신기술을 조기에 발굴해 인증하는 제도.2006년 7개 인증제도를 NET로 통합했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보건신기술과 전력신기술은 여전히 독자적인 마크를 사용,국민과 기업에 혼선을 줬다고 정부는 설명했다.

녹색 분야에서는 대기업도 내년부터 병역특례 인력을 우선 배정받을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석 · 박사급 전문 연구요원의 병역특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배정 비율이 2 대 8이었다. 대기업들은 수요가 있어도 인력을 채용할 수 없었다. 정부는 내년 7월까지 관련 제도를 정비해 녹색산업이나 신성장산업의 경우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관계없이 병역특례 배정을 우대해 주기로 했다.

이창한 지경부 산업기술정책관은 "조만간 정부 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기술 규제를 과감하게 고치거나 없애 나가겠다"고 말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