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앞세운 강경일변도 노동운동 변화 불가피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들은 25일 중도 · 실리 노선의 이경훈 후보가 당선되자 "22년 강성파업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이 후보를 지지한 조합원들은 "노조 설립 이후 '14전 13패'의 참담한 연패 기록을 갖고 있는 중도 · 실리 노선이 이번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면서 "앞으로 중도 · 실리 하면 어용으로 매도하는 강경파의 선거 구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5년 만에 중도 · 실리 노선으로 회귀
1994년 5대 이영복 노조위원장 이후 15년 만에 중도 · 실리 노선이 집행부를 되찾자 현대차 노조 내부에서도 '큰 변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만큼 노조 설립 이후 22년간 파업으로 점철돼 온 현대차 노조에서는 중도 · 실리 노선이 발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조합원들을 상대로 '정치파업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가는 강경파들에 어용으로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이 후보가 노조위원장 선거에 여섯 차례 출마해 1차 투표에서 4차례나 1위를 차지하고도 결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신 것도 이 같은 어용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금속노조 전환 이후 투쟁지향적 노동운동에 염증을 느낀 조합원들의 불만이 이 후보 지지로 분출됐다. 결선투표에서 이 후보가 강경 노선의 권오일 후보보다 5.58%포인트 높은 52.56%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도 그만큼 중도 · 실리 노선의 이 후보에게 거는 조합원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대차노조 선거 결선투표에서 5%포인트 차이는 근래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치파업에 대한 거부감이 변화 불러
노조의 한 대의원은 "요즘 상당수 조합원들은 파업의 '파'자만 들어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정치파업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며 "이러한 분위기가 이 후보의 당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현대차 조합원들은 2006년 금속산별노조 전환 이후 회사의 내부 사정과는 거리가 먼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크고 작은 정치성 파업에 잇달아 동원되면서 금속노조와의 간극이 커져갔다. 2007년과 2008년 금속노조의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파업 당시에는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노조 지도부의 강경 파업 방침에 맞서 대자보와 사내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파업 불참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조합원의 정서는 결국 노조 내부 조직과 지도부를 움직여 올 하반기 금속노조의 지역지부 전환 방침에 관계없이 노조 지도부가 기업지부장을 선출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현대차 정비노조는 금속노조에 내는 조합비 납부 거부를 결의하기도 했다. 강성노선을 지지했다는 한 조합원은 "이런 분위기에 선거공약으로 금속노조와의 연대를 외치는 자체가 패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현대차 노사관계 · 노동계에 변화오나
노조 설립 이후 22년간 파업의 악순환을 이어 온 현대차 노사관계에도 변화가 올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는 1994년 중도 · 실리 노선의 이영복 위원장이 5대 위원장에 당선된 후 현대차는 사상 처음으로 파업 없이 한 해를 보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 당선자도 "정파 이익에만 매몰돼 있는 노조를 바꾸고 늘 민심과 함께하는 조합원 행복시대를 열어 보이겠다"고 밝혀 임 · 단협 과정에서 무리한 파업 강행은 자제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노조가 변화의 바람을 탈 경우 국내 노동계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현대차 노조를 최대 투쟁동력으로 삼아 해마다 전국적인 춘투와 하투를 펼쳐 온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노동운동 방식에 적잖은 변화가 불가피해질 전망이다. 이 당선자가 이날 금속노조의 개혁을 촉구함으로써 금속노조가 산별노조 완성을 위해 추진 중인 기업지부의 지역지부 전환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선자는 이미 선거공약에서 '금속노조를 바꾸지 못하면 현대차 지부도 무너진다'는 신념을 밝혀 온 만큼 양측 간 갈등은 더욱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금속노조가 조합원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집행권력 중심의 정파 구도 때문"이라며 "앞으로 이 같은 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지도부 불신임 투쟁은 물론 의견 수렴을 통해 다른 초강경 조치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장밋빛만은 아니다"
이 후보가 당선되면서 당장 현대차노조 내 강성 현장조직 계파들끼리 합종연횡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차기 집행부도 현대차노조 내 강 · 온파 간 대립 구도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된다. 윤해모 전 지부장도 주간 연속 2교대제 시행을 둘러싸고 노조 내 강성조직들이 선명성을 내세우며 파벌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올해 임 · 단협을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한 채 중도 사퇴했다. 이 후보가 당선됐지만 노조 본부가 있는 울산공장 대부분 사업장에서 지지율이 권 후보보다 다소 낮게 나온 점도 부담이다. 노조 관계자는 "노조 현장조직들은 선거 때마다 합종연횡을 통해 집행부 선점을 노리고 있다"면서 "따라서 이 후보가 강성이 주도해 온 현대차 노조 내에서 어떻게 조직력을 복원할지가 최대 관심사"라고 말했다.
울산=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