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30년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겪은 납치 · 테러 · 사형선고 · 투옥(6년) · 망명(10년) · 가택연금 등이 골곡이 심했던 그의 정치역정을 대변한다. 그는 대선 4수끝에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른다. 외환위기 극복과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꿈을 가진 소년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 작은섬 하이도에서 4남1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지금의 하의면 후광리다. 김 전 대통령의 아호인 후광은 여기서 기인한다. 김 전 대통령은 9세까지 한학자인 초암 김련 선생이 마을에 세운 초암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다. 하의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한 후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1943년 졸업했다. 인문계가 아닌 상업학교를 택한 것은 장차 실업가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서다.

어려서부터 일제 식민통치의 서러움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자란 김 전 대통령은 상업학교 시절 작문시간에 맹자의 왕도정치와 일본 식민 통치를 비난하는 글을 지어 아버지가 교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받는 사건이 있었다. 이 무렵부터 대단히 저항적인 기질이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취직한 그는 1945년 해방 후 종업원 추대로 대표가 돼 사업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 이 시기 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선전부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에 발을 내딛게 된다.


◆험난한 정치 역정

그의 정치역정은 시작부터 어려웠다. 1961년 그는 두 번의 실패 끝에 세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당선 3일만에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이 무효된다. 그리고 정치규제에 묶이는 비운을 맞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1965년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듬해에는 정책위의장을 역임한데 이어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는다.

3선 개헌 다음해인 1970년 9월 그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됐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 · 김대중 · 이철승 의원이 함께 출마해 3파전으로 진행된 이 전당대회 결선투표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선거과정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석패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1980년초의 '서울의 봄' 때 김영삼 · 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하지만 12 · 12사태(1979)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비상계염으로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수감됐다. 5 · 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 등 해외 현지 교포들과 각국 지식인 · 문화인 · 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대통령을 향한 도전과 시련

그는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해 김영삼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급조했다. 이어 제12대 총선에서 어용 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 · 29선언을 발표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198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패하고 만다. 이듬해 4월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 전면에 나섰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또다시 고립됐다.

1992년 12월18일 그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국민의 지지를 호소했으나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에게 190만여표 차로 패배했다.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5년 6 · 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는 제1야당의 지위를 굳혔고 1997년 11월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 후보의 분열과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 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남북 관계 업그레이드

김 전 대통령은 반세기 만에 남북 교류 협력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통일 철학은 1971년 대선 후보 때 정립됐다. 당시 신민당 후보로 나선 그는 평화공존과 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 논리에 맞섰다. 기존의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대북 포용정책을 주창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결정적 순간마다 용공 시비에 휩싸이며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그는 취임 후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 연설에서 남북 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는 등 햇볕정책을 과감히 추진했다.

특히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은 순간은 국민의 뇌리에 생생하다. 분단 55년 만에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당시 두 정상이 제시한 '6 · 15 남북 공동선언'은 이후 남북 관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남북 장관급회담 등이 이어졌고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남북 간 협의가 급진전되면서 개성공단이 착공에 들어갔고 남북 경제협력과 민간 교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003년 남북이 육로관광 실시를 합의하면서 금강산 관광사업도 시작됐다. 이 모든 공로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업적은 퇴임 후 남북 정상회담 직전 현대가 4억달러,정부가 1억달러를 북측에 몰래 건넨 사실이 밝혀지면서 빛을 잃기도 했다.

김형호/김유미 기자 chsan@hankyung.com

김형호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