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자신이 사용해 오던 그림재료를 좀체 바꾸지 않는다. '물감을 바꾸느니 차라리 마누라를 바꾸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물감이나 붓 등의 사소한 변화가 곱쌓인 감각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술재료 시장은 그래서 브랜드 기호 변화가 거의 없는 '보수적'시장으로 통한다. 한번 시장을 장악한 브랜드가 수십년 이상을 지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67년 설립된 신한화구는 일본제와 미국제 등 외국산 일색이던 국내 미술재료(화구)시장을 창립 반세기 만에 '토종천하'로 바꿔놓은 국내 최대 미술재료 전문회사다. 물감은 물론 팔레트 이젤 붓 파스텔 스케치연필 등 1000여종에 달하는 미술재료 품목을 자체 제조,국내외에 판다. 특히 미대 입시생 · 화가 등 전문가용 고급 물감 시장의 80~90%를 점유하고 있다. 생산 품목 수에서는 미국 콜아트와 일본 홀베인 등과 함께 세계 3대 메이커 중 하나로 꼽힌다.
창업자 한복린 회장(84)은 "더 고운 빛을 찾기 위해 42년을 쉼없이 달려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며"신한의 빛깔,한국의 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장남인 한봉근 대표(53)가 그 꿈을 이어받아 글로벌 신한화구의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한 회장은 한국전쟁 직후 혈혈단신 월남해 부산항 부두 노동자로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하역작업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초콜릿 사탕 등을 내다파는 노점상을 벌였다.
집 살 돈이 모이고 결혼까지 해 안정을 찾자 분필,T자,삼각자 등을 떼어다 파는 문구점을 열었다. 돈이 생기면 아이들 교육에 쏟아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모들이 있는 한 문구사업은 계속 번창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학생용 그림물감을 처음 개발한 것도 이 때다. 당시 국내 물감시장은 '사쿠라' '기타' '구사카베' 같은 일제가 100% 장악하고 있었다. 한 회장은 "일제 그림물감을 종이와 캔버스,심지어 손등에도 발라보며 밤샘 연구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집 한 채 살 돈이 든 수금가방을 열차에서 소매치기 당하고,빚보증을 잘 못 서 문구점을 닫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부산 생활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한 회장은 1967년 서울 불광동에 미술재료 수입 판매상인 한일양행을 세웠다. 그리고 가슴 한편에 응어리처럼 남아있던 고급 물감 국산화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다. "고급 원료를 사다가 잘 섞으면 되는 줄 알았지.물감이 굳는 시간과 색깔이 바래는 시간,용액과 안료의 결합 상태 등 따져야 할 게 너무나 많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거든."(한복린 회장)
'시작을 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내자'는 오기로 매달린 한 회장이었다. 일본에는 둘째 아들을 보내 기술을 익혀 오도록 했다.
"눈으로 사진 찍듯 설비를 외운 뒤 화장실에 숨어 교반기와 롤러 등의 설계도와 공정도를 스케치할 때면 진땀이 흐르곤 했어요. "(차남 한성근 전무)
그렇게 해서 물감 종류를 색깔별,재질별로 하나 둘 늘려갔다.
국내시장에서는 내놓기 무섭게 팔려나갔지만 해외시장을 뚫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콧대 높은 유럽 화구상들과 자신의 미술용품 브랜드를 잘 바꾸지 않는 화가 디자이너들의 배타성 때문이었다. 철옹성 같았던 벽을 부순 때는 1979년이다. 국제화구무역협회에 가입한 뒤 미국 LA에서 열린 국제전시회에 출품한 것이 계기가 돼 해외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한 회장은 "주문량이라고 해야 트럭 한 대분도 안됐지만 수입만 해 오던 일본으로 수출을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며 "포스터컬러 목탄 화구박스 등을 포장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승승장구하던 회사가 암초를 만난 것은 1999년 말.신한화구의 질주를 경계하던 경쟁업체들이 루머를 흘려 도매상들이 거짓말처럼 하루 아침에 거래를 끊어버린 것.돈이 돌지 않자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위기를 정면 돌파한 주역은 장남,한 대표였다. 1980년 평사원으로 회사에 입사한 그는 실의에 빠진 한 회장 대신 직접 도매상과 거래금융기관을 찾아다니며 "회사는 건재하다. 장부와 공장을 그대로 보여주겠다"고 호소했다.
은행 및 거래처의 도움으로 먹구름이 걷히자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한 · 일 월드컵 개최 이후 국가 브랜드가 높아지면서 독일 프랑스 스위스 스페인 등 화구의 전통 명가인 유럽으로부터 연이은 주문이 들어온 것.특히 디자이너 스케치용 물감인 '터치마커'는 독일 시장 1위였던 일본제를 제치고 최근 점유율 20%를 넘어섰다. 지난달에는 미국 최대 화구재료상협회인 남타(NAMTA)의 공식 품질 인증을 국내 최초로 받아내기도 했다. 한봉근 대표는 "100가지가 넘는 색상을 인증받는 데만 꼬박 10여년이 걸렸다"며 "대량 수출 가능성이 열린 셈"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미래가 마냥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미술교육 퇴조에 따른 국내 내수시장의 급격한 위축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한봉근 대표는 "예술과 문학,스포츠 등 전인교육을 우선하는 게 선진국의 흐름"이라며 "매출 감소보다 대학 입시를 위해 미술시간을 없애고 미술교사를 거리로 내모는 교육 현실이 무엇보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