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와인의 자부심 상징도

"프랑스 와인 좋아하세요? 아니면 칠레 와인을 좋아하세요?"

흔히 와인을 즐긴다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다. 와인 산지가 다르면 그 맛까지 일도양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테루아(Terroir)'라는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테루아는 프랑스어로 '토양'이란 뜻으로 영어의 'Soil' 정도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테루아는 토양뿐 아니라 기후.일조량.지질.습도.강수량 등 포도가 자라 와인이 되기까지의 모든 환경을 말하기 때문이다.

통상 기후조건은 포도가 자라는 3~4개월 동안 평균 1400시간의 일조량,500~800㎜의 강수량,연중 10~20도의 기온,곰팡이 발생을 막아주는 적당한 바람 등을 말한다. 땅과 관련해서는 배수가 용이한 경사면이어야 한다는 것과 지질이 모래인지 석회인지까지도 아우르고 있다. 주로 고급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은 지질이 척박한 곳이 많다. 실제 프랑스의 5대 그랑크뤼 와인의 하나인 '샤토 오브리옹'의 산지는 그라브라는 곳인데,그라브는 '자갈'이란 뜻이다.

따라서 테루아가 다르면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도 맛과 향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최근 칠레.호주 와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프랑스 와인을 최고로 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함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테루아에는 인적요소도 포함된다. 즉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나 와이너리가 와인의 질을 중시하는지,아니면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지에 관한 것이다. 키애누 리브스가 주연한 영화 '구름속의 산책'을 보면 한밤중 갑자기 서리가 내리자 온 식구들이 밭에 나가 포도가 얼지 않도록 불을 피우며 한바탕 소동을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캘리포니아 나파밸리를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이지만 누가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그 결과물인 와인의 맛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한편 테루아는 프랑스인들에게는 그 자체로 '정체성'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한 와인이라도 미국.칠레산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테루아라는 그들만의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양념과 맛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의 '기무치'를 김치로 인정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침 며칠 있으면 국내 처음으로 와인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다. 그 타이틀 또한 '테루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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