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초정밀 기계의 축소판입니다.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김경진 한국EMC(글로벌 IT 회사로 스토리지 분야 선두) 사장은 첫마디부터 마니아 기질을 물씬 풍겼다.

몇 년 전 절판된 시계 원리에 대한 해설서 '시계구조의 이해 및 분해 조립(대광서림 발행)'을 중고 책방을 뒤져 기어코 손에 넣은 그다.

"시계 속이 뭐 그렇게 아름답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300여개의 아주 미세한 부품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에 어렸을 때부터 매력을 느꼈어요. 중학생이었을 때인가,형님이 사준 '오리엔트' 시계를 끝내 못 참고 해체했다가 조립하는 방법을 몰라 망가뜨린 적도 있습니다. 이후로도 시계를 꽤나 부숴버렸죠."

기계의 미학에 푹 빠져 항공대 전자공학과 재학 시절엔 교정에 전시돼 있던 전투기 엔진 부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기계들은 꼭 헤집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집안이 지저분해지니 좋아하실 리 없지요. 장래를 위해서도 만날 기계만 만지고 있는 아들이 달가울 리 없으셨을 거고요. 그래도 가전 제품을 공짜로 수리해 드릴 땐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 그는 손재주가 좋아 선풍기,라디오쯤은 뚝딱 만들어내고,오디오의 핵심으로 불리는 진공관 확성기도 직접 만들어 썼다. 시계 예찬론자인 만큼 수집에도 열을 올릴 법하건만 김 사장이 소장한 시계는 늘 차고 다니는 '롤렉스'를 포함해 딱 7개다. 집무실 뒤편 비밀금고에 회사 기밀서류와 함께 '모셔 놓고'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곤 하는 것들이다.

"스위스의 태그 호이어라는 스포츠용 시계에 꽤 애착이 갑니다. 6년 전 출장길에 단순한 디자인이 매력적이어서 구입한 몽블랑 시계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요. 요즘엔 웬만한 외제차 한 대 값에 버금가는 수천만원짜리 시계도 많잖아요. 저는 기계 본연의 모습을 넘어서 마치 보석처럼 값비싼 장식이 된 시계에는 별로 정이 가지 않습니다. "

옛날 얘기에 한창 신이 나 있을 즈음,"성격도 시계를 닮았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집에서는 심하다 싶을 만큼 태엽을 확 풀어놓습니다. 제 집사람과 아들이 저를 아주 게으른 사람 취급할 정도거든요. 하지만 회사에선 달라지지요. 조직과 시계 모두 정밀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게 제 지론이거든요. 직원들에게 비친 제 모습은 아마 워커홀릭에 시간 관념이 철저한 사장일 것입니다. "

요즘은 소문이 나서 덜한 편이긴 하지만 이런 김 사장의 성격을 모르고 들어온 경력 사원들 중에 혼쭐난 이들도 꽤 된다. "오전 9시에 미팅하자고 하면 대부분 9시까지만 오면 되는 줄 알더군요. 제가 지시한 것을 사전에 모두 준비한 뒤에 정각 9시에 미팅을 시작한다는 것인데도 말이죠."

시계처럼 꼼꼼한 성격 덕분인지 김 사장은 지난달 말에 아시아 임원 중에서는 처음으로 본사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본사 인사 담당이 한국에 왔을 때 '당신 조직처럼 정밀하게 잘 돌아가는 지사는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두 달 있다가 느닷없이 승진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

시계에 빗댄 조직론을 얘기하며 김 사장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조직과 시계는 비슷한 점이 많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직엔 변화가 필요해요. 시계는 늘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주면 되지만 조직이 3년 후에도 그대로 있다면 사멸하고 말 거예요. 조직이 기계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셈이지요. "

김 사장의 시계 사랑은 단순히 기계에 대한 애착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시계에 관한 것이라면 역사,과학 등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왜 내가 시계에 열광할까 고민해 봤습니다. 재미있는 게 시계,다시 말해 시간 자체가 권력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힘에 매료됐던 것이죠.예컨대 영국이 해상 무역을 장악하며 세계를 지배할 무렵,진자 시계는 정확한 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줬어요. 시계가 팍스 브리태니카를 열게 한 최대 무기였던 셈입니다. 슈퍼 컴퓨터라는 것도 그 안에 아주 정밀한 시계가 있기 때문에 그만한 연산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

요즘 김 사장의 최대 관심과 소망은 부품을 조립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을 직접 해보는 것이다. "은퇴 후엔 목수가 될 생각입니다. 이것 보세요. 경복궁을 건축학적으로 해석한 책인데 얼마나 정밀합니까.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딱딱한 기계를 만지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무 건축의 백미인 우리 한옥 만드는 일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집 지어 놓으면 꼭 놀러오세요. "

글=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사진=양윤모 기자 yoonm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