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16) 신성금고제작소 ‥ 대연각 화재때 신성금고만 멀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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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
서울 충무로 대연각호텔에서 프로판가스 폭발로 화재가 발생했다.
163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당한 대형 참사였다.
이 화재로 건물 1층에 있던 외환은행 충무로 지점도 전소됐지만 유일하게 은행 금고실(금고실은 금고출입문과 철제 벽체로 구성되며 통상 은행 지점에 들어가는 금고실의 면적은 20㎡ 안팎)만 타지 않고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이 금고실을 만든 회사가 우리나라 금고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신성금고제작소(대표 김헌영)이다.
신성금고제작소는 창업주인 고 김명복씨(1985년 작고)가 22세의 나이로 1932년 서울시 중구 오장동에 '김명복 금고상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 미나도 금고의 공장장을 맡고 있던 김씨는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로부터 공장을 물려받아 국내 최초로 금고 제작업에 뛰어들었다.
금고업이 발달한 일본의 기술을 전수받은 김씨는 일반 가정용 금고부터 은행에 들어가는 금고실까지 모두 만들어 팔았다.
당시에는 금고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금고회사가 전무했던 만큼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서도 김씨에게 금고 제작을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신성금고는 우리나라 중앙은행에 독점적으로 금고실을 공급하고 있다.
1958년 신성금고제작소로 사명을 변경한 후에도 한국은행 본점과 전국에 퍼져 있는 지점에 100여대가 넘는 금고실이 납품됐다.
신성금고제작소는 외환위기를 제외하고는 설립 후 매출이 줄어든 적이 없다.
국내 경제성장과 더불어 은행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은행의 새 지점이 생길 때마다 주문이 들어왔다.
1978년 서울 강남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은행 지점 숫자는 폭발적로 늘어났다.
1996년에는 대당 3000만원가량 하는 금고실을 300대 넘게 팔아 13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하루에 한 지점씩 금고실을 설치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국민,우리,외환은행 등 대부분의 시중은행에 각각 1000대가 넘는 금고실을 공급했다.
수요 폭증 추세에 편승,몇몇 금고제작업체가 생겨났지만 시장에서 신성금고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와 관련,김헌영 대표는 "보안이 생명인 금고업의 특성상 소비자들은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온 업체를 선호하고 조금 비싸더라도 안전한 제품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창업주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업에 눈길 한 번 안 주고 안전한 금고 만드는 기술만 연구해왔다"며 "국내에서 은행 금고실이나 금은방이 털린 사건이 몇 번 있었지만 우리가 납품한 금고가 뚫린 적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1975년 한양대학교 공대를 졸업한 후 회사에 합류했다.
김 대표의 큰형은 1970년대 유명 탤런트였던 김무영씨로 사업에 뜻이 없었고,작은형도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막내인 김 대표가 가업을 물려받게 됐다.
그는 입사한 뒤 한 달에 1만3000원을 받으며 공장 청소부터 했다.
김 대표는 1984년 창업주가 작고하기 직전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김 대표가 회사를 맡으면서 이 회사의 기술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그는 공대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직접 금고 도면을 그리고 튼튼한 소재를 개발하는 등 안전하고 실용적인 금고 개발에 몰두했다.
대표적 작품이 슬라이딩 도어 금고실.은행 금고에 많은 현금을 넣어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드는데다 기존의 핸들식 금고가 지점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크기가 작아 설치 공간을 줄일 수 있는 슬라이딩 도어 금고실을 개발했다.
이후 대부분의 은행은 김 대표가 개발한 슬라이딩 도어 금고실을 각 지점에 설치하고 있다.
1999년부터는 김 대표의 외아들 김정욱 실장(31)이 3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 영업을 담당한 김 실장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차근차근 금고제작업을 익히는 중이다.
김 대표는 "2~3년 후 계획하고 있는 회사의 증시 상장이 잘 마무리돼 유능한 인재들이 아들과 함께 회사를 키워나갈 여건이 되면 그때부터는 3대 경영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
서울 충무로 대연각호텔에서 프로판가스 폭발로 화재가 발생했다.
163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당한 대형 참사였다.
이 화재로 건물 1층에 있던 외환은행 충무로 지점도 전소됐지만 유일하게 은행 금고실(금고실은 금고출입문과 철제 벽체로 구성되며 통상 은행 지점에 들어가는 금고실의 면적은 20㎡ 안팎)만 타지 않고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이 금고실을 만든 회사가 우리나라 금고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신성금고제작소(대표 김헌영)이다.
신성금고제작소는 창업주인 고 김명복씨(1985년 작고)가 22세의 나이로 1932년 서울시 중구 오장동에 '김명복 금고상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 미나도 금고의 공장장을 맡고 있던 김씨는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로부터 공장을 물려받아 국내 최초로 금고 제작업에 뛰어들었다.
금고업이 발달한 일본의 기술을 전수받은 김씨는 일반 가정용 금고부터 은행에 들어가는 금고실까지 모두 만들어 팔았다.
당시에는 금고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지만 금고회사가 전무했던 만큼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서도 김씨에게 금고 제작을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신성금고는 우리나라 중앙은행에 독점적으로 금고실을 공급하고 있다.
1958년 신성금고제작소로 사명을 변경한 후에도 한국은행 본점과 전국에 퍼져 있는 지점에 100여대가 넘는 금고실이 납품됐다.
신성금고제작소는 외환위기를 제외하고는 설립 후 매출이 줄어든 적이 없다.
국내 경제성장과 더불어 은행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은행의 새 지점이 생길 때마다 주문이 들어왔다.
1978년 서울 강남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은행 지점 숫자는 폭발적로 늘어났다.
1996년에는 대당 3000만원가량 하는 금고실을 300대 넘게 팔아 13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하루에 한 지점씩 금고실을 설치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국민,우리,외환은행 등 대부분의 시중은행에 각각 1000대가 넘는 금고실을 공급했다.
수요 폭증 추세에 편승,몇몇 금고제작업체가 생겨났지만 시장에서 신성금고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와 관련,김헌영 대표는 "보안이 생명인 금고업의 특성상 소비자들은 오랜 기간 신뢰를 쌓아온 업체를 선호하고 조금 비싸더라도 안전한 제품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창업주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업에 눈길 한 번 안 주고 안전한 금고 만드는 기술만 연구해왔다"며 "국내에서 은행 금고실이나 금은방이 털린 사건이 몇 번 있었지만 우리가 납품한 금고가 뚫린 적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없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1975년 한양대학교 공대를 졸업한 후 회사에 합류했다.
김 대표의 큰형은 1970년대 유명 탤런트였던 김무영씨로 사업에 뜻이 없었고,작은형도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막내인 김 대표가 가업을 물려받게 됐다.
그는 입사한 뒤 한 달에 1만3000원을 받으며 공장 청소부터 했다.
김 대표는 1984년 창업주가 작고하기 직전 사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김 대표가 회사를 맡으면서 이 회사의 기술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그는 공대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직접 금고 도면을 그리고 튼튼한 소재를 개발하는 등 안전하고 실용적인 금고 개발에 몰두했다.
대표적 작품이 슬라이딩 도어 금고실.은행 금고에 많은 현금을 넣어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드는데다 기존의 핸들식 금고가 지점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크기가 작아 설치 공간을 줄일 수 있는 슬라이딩 도어 금고실을 개발했다.
이후 대부분의 은행은 김 대표가 개발한 슬라이딩 도어 금고실을 각 지점에 설치하고 있다.
1999년부터는 김 대표의 외아들 김정욱 실장(31)이 3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현재 영업을 담당한 김 실장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차근차근 금고제작업을 익히는 중이다.
김 대표는 "2~3년 후 계획하고 있는 회사의 증시 상장이 잘 마무리돼 유능한 인재들이 아들과 함께 회사를 키워나갈 여건이 되면 그때부터는 3대 경영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