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부동산실명제 위반 사실을 과세 당국에 적극적으로 통보키로 함에 따라 부동산 명의신탁의 설 땅이 없어지게 됐다.

그동안 법원은 명의신탁 사실만 판단해주는 데 그쳤으나 적극적으로 신고까지 함으로써 명의신탁으로 재산을 숨긴 뒤 재판으로 되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게 됐다.

신탁자(원 소유자)들이 재판을 통해 재산을 되찾더라도 실명제법 위반에 따른 과징금(최대 시가의 30%)을 피할 수 없어서다.

◆이제 명의자가 배신하면 큰일

부동산실명제법이 도입된 지 12년이 지났지만 대법원은 끊임없이 명의신탁(名義信託.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소유한 행위)을 인정해 명의자(명의수탁자.명목상 보유자)를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소송 등에서 실제 소유주(명의신탁자.차명보유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명의신탁 약정을 언제 맺었느냐에 따라 돌려받을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진다.

1996년 7월 이전에 맺은 명의신탁약정은 부동산실명제 도입 이전(유예기간 포함)이므로 대법원은 '부동산 자체'를 실소유자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맺은 계약명의신탁의 경우 대법원이 보호하는 재산권은 '매매대금'에 한정된다.

예컨대 10억원짜리 주택을 남의 이름을 빌려 매입했던 명의신탁자가 소송을 통해 되찾을 때에는 현재 시점에서 주택 가격이 20억원으로 올랐더라도 매입 자금에 해당되는 10억원만 명의자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다.

여기에 법원의 통보로 과세 당국이 과징금을 최대 6억원(부동산 가액의 30% 이내) 부과하면 실질적으로 명의신탁자는 4억원만 되찾을 수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실명제 유예기간이 끝난 관계로 명의신탁을 자진신고하더라도 과징금을 경감받을 수는 없다"며 "명의자가 안돌려주겠다고 배신해서 반환소송을 벌이는 지경까지 가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차명 부동산을 자신 명의로 돌려놓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이번 조치는 명의자들이 '변심'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1996년 이후 명의자들은 반환소송에서 지더라도 부동산가치 상승에 따른 차액은 챙길 수 있다.

이런 '부당이득'이 과연 사법정의에 맞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차명 보유자들이 탈세.투기 목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만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논리가 우세하다.

◆하급심,재산권 반환도 인정 안해

최근 하급심에서는 아예 명의자가 원주인에게 부동산이나 매매대금 자체를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고 있다.

성매매업소가 여종업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주는 선불금과 마찬가지로,명의신탁이 탈세.투기 등 불법적인 원인을 이유로 남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등기하는 '불법원인 급여'에 해당되기 때문에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물론 대법원은 아직까지 하급심을 인정하지 않고 실소유주를 보호하는 판례를 계속 내고 있지만 향후 다른 판례를 확립할지도 모른다.

◆행정제재 효율성 높아져

법원은 그동안 부동산실명법에서 무효로 규정한 명의신탁을 판례로 인정해줬다.

더욱이 재판 과정에서 실명법 위반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갔다.

배현태 대법원 공보심의관은 "일선 판사들은 자신의 판결이 상급심에서 뒤집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송 과정에서 실명제법 위반 사실을 발견해도 세무 당국에 통보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법원이 부동산 투기와 탈세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본지 12월4일자 A33면 참조>

대법원의 이번 예규 제정은 행정적 제재에 동참키로 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윤성원 법원행정처 민사총괄심의관(부장판사)은 "법 위반 사실을 과세 당국에 통보할 것을 의무화함에 따라 판사들이 적극적으로 행정 제재에 기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