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영재를 조기 발굴해 우수한 이공계 인력으로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고가 첫 졸업생을 배출한 지 20년.세계적인 과학자의 꿈을 안고 과학고에 들어간 '사이언스 키드'들은 이제 한국 이공계를 이끄는 성장 동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과학고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명문대 입시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일부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우리나라 과학 발전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과학고는 국내 '20대 이공계 박사'의 산실인 까닭이다.

1983년 최초로 세워진 경기과학고에서만 지금까지 225명의 20대 박사가 나왔다.

경기과학고 총동문회장인 김형신 충남대 교수(1기·39)는 "1년에 200건의 실험을 하는 등 일반고에서는 불가능한 실습 위주 교육을 받고 활발한 토론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키워 과학자로서 탄탄한 기본기 교육을 받은 것이 과학고 출신들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과학고 출신들은 한국 과학기술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창의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으며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경기과학고 3~6기 출신들이 두드러진다.

3~6기 졸업생 285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43명이 20대에 박사학위를 취득,'20대 박사 비율'이 경기과학고 다른 기수나 타 과학고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이 학교 관계자는 "1,2기는 경기도 출신만 뽑았고 3기부터 1989년 서울과학고가 생기기 직전인 6기까지는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지역에서 응시했다"며 "가장 치열한 입학 경쟁을 뚫고 들어온 만큼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경기과학고 6기인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34)가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과학 베스트셀러인 '과학콘서트' 저자인 그는 KAIST에서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은 토종으로 대뇌정보처리 분야에서 세계적인 과학자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정 교수는 '복잡계 모델링'이라는 물리학적 도구로 인간의 의식활동을 연구한다.

100억개에 달하는 뇌세포가 신호를 주고받는 복잡한 과정을 모델링해 각종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궁극적인 연구 목표는 뇌파 시스템을 조절해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그는 박사과정과 미국 예일대 박사후 연구원 시절 알츠하이머병이나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을 뇌파 정보 분석으로 모델링한 논문들을 '임상 신경생리학 저널' 등 권위있는 정신의학 학술지에 잇따라 발표하면서 세계 정신의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같은 성과를 인정받아 미국 컬럼비아 의대 겸임교수로 임용됐다.

컬럼비아 의대가 물리학자를 교수로 임용한 것은 정 교수가 처음.그가 연구하는 대뇌정보처리 분야가 정신의학계에서 새로운 진단 및 치료 과정으로 주목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 교수는 8개월은 한국에서,4개월은 미국에서 강의한다.

5기인 윤준보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35)는 국내 'MEMS'(마이크로 크기의 전기·기계 시스템) 연구의 선두주자다.

MEMS는 자동차의 첨단 센서나 디스플레이의 초소형 빔 프로젝터 등에 활용하는 첨단 기술.윤 교수는 MEMS 기술을 이용해 3차원 구조의 인덕터를 반도체 칩에 넣어 휴대폰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공정기술을 박사논문으로 발표해 주목받았다.

이 기술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MEMS 교과서에 실려 있다.

최근에는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TI사의 초소형 빔 프로젝터보다 견고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독자적 스프링 구조를 이용한 극미세 거울 디스플레이'를 개발,미국 일본 유럽에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

4기인 최성현 서울대 전자공학부 교수(36)는 인텔의 센트리노 기술로 알려진 무선랜(IEEE 802.11) 연구의 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무선랜의 음성·영상 전송속도를 보장하고 단말기의 배터리 소모를 절감하는 방법 등에 대한 연구 성과는 국제전기전자학회(IEEE) 학술지인 '인포콤'에 5편의 논문이 실리는 등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최 교수는 지난해 완료한 '무선랜의 서비스 보장'(IEEE 802.11e)에 대한 국제 표준 선정 작업을 주도했다.

3기인 이현우 포스텍(옛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37)는 '나노전도 이론'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나노전도 이론은 금속 등의 물질 크기가 작아질 때 발생하는 여러 가지 양자역학적 효과가 물질의 전기 저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이 교수는 금이나 소듐 같은 도선의 두께가 극도로 얇아질 때 양자역학적 효과로 인해 도선 길이가 증가함에 따라 전기 저항이 증감을 반복하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이론적으로 예측한 논문을 2001년 미국 물리학회 학술지에 게재,세계 물리학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경남과학고 출신으로는 5기인 이효철 KAIST 화학과 교수(34)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액체의 화학 반응에서 일어나는 분자 구조의 빠른 움직임을 100억분의 1초 길이의 광원인 '엑스선 펄스'로 실시간 측정해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내용은 세계적인 과학저널인 사이언스에 실렸다.

당시 사이언스 심사위원들은 "기존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것을 실험으로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이 논문은 사이언스 게재 논문 중 일부에게만 허용하는 사이언스 하이라이트에도 실렸다.

2기인 한세광 포스텍 신소재공학과 교수(37)는 LG생명과학 연구원으로 근무할 당시 성장호르몬이 인체 내에서 천천히 방출되도록 하는 신약을 개발해 주목받았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