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시절,짧은 겨울 해를 등지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던 중년 가장들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궁핍한 시대에 태어나 개발 연대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견디며 험한 세상 헤쳐 온 우리 시대 아버지들.이제는 일터와 삶터에서 변방으로 밀려나며 갈수록 위축되는 '고개 숙인 이름들'.그러나 삶의 고비마다 말 없는 버팀목이 되어 주고,추운 날의 따끈한 군고구마처럼 희망의 불씨를 키워주는 부정(父情)의 깊이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지혜'(팀 루서트 지음,이경식 옮김,문학수첩)에는 이처럼 소중하면서도 잊혀지기 쉬운 아버지의 사랑과 추억이 듬뿍 담겨 있다.

유명 앵커인 저자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한 후 감동받은 독자들로부터 온 편지를 재구성한 것.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아들을 22년 만에 처음으로 꼭 껴안으며 눈물을 떨군 노병,실연당한 딸에게 '내가 만일 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결혼해 달라고 했을 거야'라며 자신감을 되찾아 준 엔지니어,'자만하지 마라.기차를 끄는 건 호각 소리가 아니다'라는 교훈을 일깨워 준 보험 판매원….책장을 넘기다 보면 아버지의 작은 몸짓이나 단순한 말이 자녀에게 최고의 순간을 선사한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368쪽,9800원.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