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19세기 초 획기적 변모를 겪은 영국경제는 영국사회만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유럽대륙,비유럽 세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쳐 국제정치,군사적 세력균형까지 바꿔 놓았다.

산업혁명은 여러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본질 가운데 핵심은 △에너지 사용면에서의 혁신 △각종 기계발달 △합성원자재 등장 △공장제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기술진보이다.


산업혁명을 '기술적 창조성으로 추진된 생산기술의 급속한 변화'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산업혁명을 이끈 면직업은 1760년 무렵에는 영국북부에서 소규모 가내공업으로 운영됐다.

면직부문의 기계화 문제는 물레와 베틀 간의 능률불균형을 메우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다.

이 과정에서 방적기가 도입되어 거듭 개선됐다.

베짜기가 결국 이러한 실잣기의 신기술과 보조를 맞춰(역직기) 1815∼1840년 쯤이면 면직업 전체에 걸쳐 공장생산이 확대된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수업용 과학기자재를 담당한 기술자였다.

물리학 수업시간에 쓰는 뉴코맨 증기엔진을 수리하던 중 그의 증기기관이 탄생했다.

당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를 다루는 숙련노동,정확한 기계부속,위험을 감수하고 그의 발명에 투자할 돈 등이었다.

20년 넘는 노력 끝에 와트의 증기기관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1780년대 말).이것은 다른 산업에도 중요한 돌파구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 덕분에 영국 제철공업의 철생산 능력은 18세기 중엽부터 100년간 200배 늘었다.

산업혁명기의 '거시발명'(전혀 새로운 방법이나 상품)은 이외에도 많지만 면직기술이든 증기기관이든 고도의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작업현장에서 기술혁신기회를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일반인이 간단한 아이디어를 적용해 얻어낸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당시 영국인의 사업은 전문기술,대규모 자본,정부의 조직과 계획에 의한 지원없이 소규모 가족자본을 기초로 번영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기업구조는 분산적이고 분리되었으며 시장에서 복잡한 영업거래망으로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기술,사업구조는 상황에 쉽게 적응하고 신속히 확대될 수 있었으나 훗날 산업발전에서 계획과 집중,통합의 이점이 중요해지는 단계에 이르면 효율이 떨어진다.

18세기 영국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과학발달 수준은 뒤졌으나 생산기술의 우위를 누리기 좋은 여건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거시발명의 군집이 동시다발로 출현하는 이유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영국은 '미시발명'(소소한 부가적 개선)에 비교우위가 있었는데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술이전을 자극하는 도제제도가 잘 운영되었고 현장훈련 중시로 기능공이 많았으며 이들의 교류도 활발했다.

또한 종교전쟁 이후 우수한 기술인력이 영국에 많이 이주했다.

정보전파를 담당하는 단체들의 역할도 컸다.

군주와 귀족 간 헌정질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 진 후(1688년,명예혁명) 안정되고 예측가능하게 국가를 다스리는 정부가 정착했다.

정부는 개인의 자유,사유재산보장,기술변화,자유시장을 추구하며 규제를 거의 하지 않았다.

중세 이래 사업경험이 많은 기업가층,임금농업노동자층도 두터웠다.

중앙은행,신용제도도 일찍 잘 발달했다.

또한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국내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육로보다 수로운송비가 저렴하던 시절,영국 어느 곳에서든 20마일 이내에 내륙수로에 닿을 수 있는 자연환경도 국내시장발달과 관련이 있다.

기술혁신에 저항하는 집단의 정치력은 어떠했는가? 기계가 노동을 대체해 실업을 양산하므로 미숙련노동의 저항이 심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

산업혁명기 노동-자본비율은 거의 불변이었고 신기술이 노동절약적인 것도 아니었다.

물론 기술변화로 타격을 입은 기존의 기업과 숙련공의 저항은 컸다.

손해가 막심했던 수직포공,모직완성공,인쇄업자,마차제조소,대장간 등은 가격하락으로 이득을 보는 소비자에 비해 소수였지만 조직력을 이용해 저항했다.

그러나 거의 실패했다.

1760∼1830년 영국의 정치력은 이들이 아닌 토지재산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유럽에 비해 장인길드의 힘이 약했던 영국은 대규모시장을 대상으로대량생산을 시작할 유인도 컸다.

일단 인류를 수확체감과 맬서스의 덫에서 벗어나게 한 기술진보가 축적되었고 이것이 다음 단계에서는 결국 과학발달,체계적 연구개발과 연결되어 첨단기술 쪽으로 박차를 가했다.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가 이리저리 뛰기 시작하자 이제 이를 다시 묶어두기 어렵게 되었다.

같은 제목의 시를 쓴 셸리(P. B. Shelley 1792∼1822)의 부인(Mary)이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다.

산업혁명 이후 평균적 생활수준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으나 이제 핵전쟁,인간복제 등의 악몽도 떨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서울대 경제학 dya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