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서부 極地 2만km 대장정] (14) 서역의 중심 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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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가르에서 쿠처(庫車)를 향해 동북 쪽으로 가는 314번 국도는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왕복 2차로로 좁아진다.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 가로수도 사라지고 길 왼편에는 톈산난마이(天山南脈)가,오른편엔 황량한 사막과 철로가 동행한다.
나무와 풀은 하나도 없이 벌겋고 누런색이 반복되는 톈산난마이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만물상을 그려내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따금 사막 위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도대체 몇 량이나 연결해서 가는지 끝이 가물가물하다.
[ 사진 : 3-11세기에 걸쳐 절벽에 300여개의 석굴법당을 조성한 커쯔얼천불동. 풍상에 씻기고 사람에 의해 훼손돼 보기에 안쓰럽다. ]
톈산난마이의 발치에 있는 아커쑤(阿克蘇)에서 하룻밤을 자고 쿠처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신라의 혜초 스님이 구법여행 때 카슈가르를 지나 이곳을 거쳐갔고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인의 기개를 펼쳤던 무대가 아닌가.
기원전 1,2세기부터 중국의 역사서에 '추츠(龜玆)'로 등장하는 쿠처의 역사는 중국의 정복과 이에 맞선 독립의 반복이었다.
한대에는 쿠처에서 동쪽으로 60여km 떨어진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해 여러 나라를 다스렸고,서역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실크로드가 열렸다.
전한이 멸망하자 쿠처는 흉노와 제휴해 카슈가르를 속국으로 만들며 세력을 키웠으나 후한 때인 73년 반초 장군이 쿠처를 점령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한다.
반초가 죽은 지 4년 만에 서역도호부가 폐지되고 다시 독립왕국이 됐으나 전진왕 부견이 파견한 여광 장군에 의해 또다시 패하고 만다.
그후 당은 다시 서역을 평정한 뒤 쿠처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해 서역 전 지역을 호령했다.
고선지 장군도 이 쿠처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부도호까지 승진하고 747년 길기트 원정을 떠나 이 일대를 평정한 후 안서도호로 승진했다.
하지만 지금 쿠처에선 고선지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도,징표도 찾기 어렵다.
현지 안내원도 "들어본 적이 없다"니 답답할 뿐이다.
쿠처판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처의 옛 성벽이 있긴 하지만 '龜玆故城遺址(구자고성유지)'라고 쓴 표지석만 잡풀 속에 덩그러니 있을 뿐 이렇다 할 설명도 없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며 집들은 장려하다"고 했던 당나라 현장(玄裝·602~664) 법사의 기록(대당서역기)은 한낱 옛 이야기일 뿐인가.
현장 법사에 따르면 쿠처왕국은 동서 길이 1000여리,남북이 600여리에 달했고 도성 주위가 17리나 됐다고 한다.
8만 남짓한 인구에 사원이 100여곳,승려가 5000명을 넘었다니 사막도시로선 매우 큰 규모였던 모양이다.
신라의 혜초 스님도 '왕오천축국전'에서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이곳은 안서대도호부로서 중국 군대의 대규모 집결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승은 대승법을 행한다"고 했다.
혜초는 또한 "큰 성 서문 밖 길가 좌우에 입불(立佛)이 있는데 높이가 90여척 이나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자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이 입불상 앞에서 5년마다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참여하는 무차대법회가 수십일 동안 열렸다는데 찾을 길이 없다.
다음날 아침 쿠처 최대의 석굴사원인 커쯔얼(克孜爾) 천불동(千佛洞)으로 향한다.
쿠처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나서 65km쯤 달려가자 바이청(拜城)현 못 미친 곳에서 커쯔얼 천불동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천불동 입구에 도착하자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가 시원스레 뻗어 있고 그 너머로 밍우다거(明屋達格)산에 조성된 석굴들이 마치 벌집처럼 촘촘하게 보인다.
천불동 앞에는 무자티강의 지류인 웨이간허(渭干河)가 흐르고 있다.
백양나무길이 끝나는 곳,석굴 앞 광장에는 검은 빛깔의 커다란 좌상이 조성돼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구마라습(仇摩羅什·343~413) 스님이다.
인도의 귀족 구마라염과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 기바 사이에서 태어난 구마라습은 일생을 불경 공부와 역경에 바쳐 현장,법현과 함께 중국의 3대 역경승(譯經僧)에 포함된다고 안내원은 설명한다.
그가 번역한 불경이 35부 294책에 이른다고 한다.
추츠국이 있던 3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11세기 무렵에 완성된 커쯔얼 천불동은 추츠 문화의 보고다.
원래 웨이간허 왼편 절벽에 3km가량에 걸쳐 300개 이상의 석굴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의 풍상과 인위적 훼손으로 원형을 크게 상실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석굴은 236개.벽화는 75개 석굴에 남아 있는데 벽화 면적만 1만㎡에 이를 만큼 석굴 내부 전체가 벽화로 장식돼 있다.
이 가운데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38개 석굴은 1인당 100위안의 관람료를 추가로 내야 볼 수 있고 불상이 있는 석굴은 500위안을 내야 한다.
일반 공개 석굴은 7개에 불과하다.
천불동 석굴의 벽화들은 20세기 초 일본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의 탐험대가 대부분 뜯어갔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03년에 뜯어온 벽화가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으니 우리도 남의 문화재를 훔친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석굴 안에 들어서니 겨우 형상이나 알아볼 수 있을 뿐 훼손된 석굴의 현실에 가슴이 아프다.
10호굴에서 만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프랑스 유학 때 비단길을 답사하며 이 천불동의 존재를 알고 석굴벽화 복원 작업에 크게 기여했던 옌볜 동포 화가 한락연(韓樂然) 선생이다.
쿠처로 돌아오는 길,쿠처에서 12km가량 떨어진 벌판 한가운데에 높다란 망루 같은 것이 홀로 서 있다.
가까이 가 보니 1세기 한나라 때 나무와 흙 자갈 등으로 축조한 '커쯔얼가하봉화대'다.
원래 높이는 20m를 넘었으나 지금은 13.5m만 남았다.
그래도 신장에선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봉화대라고 한다.
이 봉화대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서역 일대를 다스렸겠지만 세월 앞에선 승자,패자가 어디 있겠는가.
쿠처=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 가로수도 사라지고 길 왼편에는 톈산난마이(天山南脈)가,오른편엔 황량한 사막과 철로가 동행한다.
나무와 풀은 하나도 없이 벌겋고 누런색이 반복되는 톈산난마이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만물상을 그려내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따금 사막 위 철로를 달리는 기차는 도대체 몇 량이나 연결해서 가는지 끝이 가물가물하다.
[ 사진 : 3-11세기에 걸쳐 절벽에 300여개의 석굴법당을 조성한 커쯔얼천불동. 풍상에 씻기고 사람에 의해 훼손돼 보기에 안쓰럽다. ]
톈산난마이의 발치에 있는 아커쑤(阿克蘇)에서 하룻밤을 자고 쿠처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
신라의 혜초 스님이 구법여행 때 카슈가르를 지나 이곳을 거쳐갔고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인의 기개를 펼쳤던 무대가 아닌가.
기원전 1,2세기부터 중국의 역사서에 '추츠(龜玆)'로 등장하는 쿠처의 역사는 중국의 정복과 이에 맞선 독립의 반복이었다.
한대에는 쿠처에서 동쪽으로 60여km 떨어진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해 여러 나라를 다스렸고,서역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실크로드가 열렸다.
전한이 멸망하자 쿠처는 흉노와 제휴해 카슈가르를 속국으로 만들며 세력을 키웠으나 후한 때인 73년 반초 장군이 쿠처를 점령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한다.
반초가 죽은 지 4년 만에 서역도호부가 폐지되고 다시 독립왕국이 됐으나 전진왕 부견이 파견한 여광 장군에 의해 또다시 패하고 만다.
그후 당은 다시 서역을 평정한 뒤 쿠처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해 서역 전 지역을 호령했다.
고선지 장군도 이 쿠처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부도호까지 승진하고 747년 길기트 원정을 떠나 이 일대를 평정한 후 안서도호로 승진했다.
하지만 지금 쿠처에선 고선지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도,징표도 찾기 어렵다.
현지 안내원도 "들어본 적이 없다"니 답답할 뿐이다.
쿠처판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처의 옛 성벽이 있긴 하지만 '龜玆故城遺址(구자고성유지)'라고 쓴 표지석만 잡풀 속에 덩그러니 있을 뿐 이렇다 할 설명도 없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며 집들은 장려하다"고 했던 당나라 현장(玄裝·602~664) 법사의 기록(대당서역기)은 한낱 옛 이야기일 뿐인가.
현장 법사에 따르면 쿠처왕국은 동서 길이 1000여리,남북이 600여리에 달했고 도성 주위가 17리나 됐다고 한다.
8만 남짓한 인구에 사원이 100여곳,승려가 5000명을 넘었다니 사막도시로선 매우 큰 규모였던 모양이다.
신라의 혜초 스님도 '왕오천축국전'에서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이곳은 안서대도호부로서 중국 군대의 대규모 집결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승은 대승법을 행한다"고 했다.
혜초는 또한 "큰 성 서문 밖 길가 좌우에 입불(立佛)이 있는데 높이가 90여척 이나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자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다.
이 입불상 앞에서 5년마다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참여하는 무차대법회가 수십일 동안 열렸다는데 찾을 길이 없다.
다음날 아침 쿠처 최대의 석굴사원인 커쯔얼(克孜爾) 천불동(千佛洞)으로 향한다.
쿠처에서 서북쪽으로 길을 나서 65km쯤 달려가자 바이청(拜城)현 못 미친 곳에서 커쯔얼 천불동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천불동 입구에 도착하자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가 시원스레 뻗어 있고 그 너머로 밍우다거(明屋達格)산에 조성된 석굴들이 마치 벌집처럼 촘촘하게 보인다.
천불동 앞에는 무자티강의 지류인 웨이간허(渭干河)가 흐르고 있다.
백양나무길이 끝나는 곳,석굴 앞 광장에는 검은 빛깔의 커다란 좌상이 조성돼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구마라습(仇摩羅什·343~413) 스님이다.
인도의 귀족 구마라염과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 기바 사이에서 태어난 구마라습은 일생을 불경 공부와 역경에 바쳐 현장,법현과 함께 중국의 3대 역경승(譯經僧)에 포함된다고 안내원은 설명한다.
그가 번역한 불경이 35부 294책에 이른다고 한다.
추츠국이 있던 3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11세기 무렵에 완성된 커쯔얼 천불동은 추츠 문화의 보고다.
원래 웨이간허 왼편 절벽에 3km가량에 걸쳐 300개 이상의 석굴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의 풍상과 인위적 훼손으로 원형을 크게 상실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석굴은 236개.벽화는 75개 석굴에 남아 있는데 벽화 면적만 1만㎡에 이를 만큼 석굴 내부 전체가 벽화로 장식돼 있다.
이 가운데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38개 석굴은 1인당 100위안의 관람료를 추가로 내야 볼 수 있고 불상이 있는 석굴은 500위안을 내야 한다.
일반 공개 석굴은 7개에 불과하다.
천불동 석굴의 벽화들은 20세기 초 일본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의 탐험대가 대부분 뜯어갔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03년에 뜯어온 벽화가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으니 우리도 남의 문화재를 훔친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석굴 안에 들어서니 겨우 형상이나 알아볼 수 있을 뿐 훼손된 석굴의 현실에 가슴이 아프다.
10호굴에서 만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프랑스 유학 때 비단길을 답사하며 이 천불동의 존재를 알고 석굴벽화 복원 작업에 크게 기여했던 옌볜 동포 화가 한락연(韓樂然) 선생이다.
쿠처로 돌아오는 길,쿠처에서 12km가량 떨어진 벌판 한가운데에 높다란 망루 같은 것이 홀로 서 있다.
가까이 가 보니 1세기 한나라 때 나무와 흙 자갈 등으로 축조한 '커쯔얼가하봉화대'다.
원래 높이는 20m를 넘었으나 지금은 13.5m만 남았다.
그래도 신장에선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봉화대라고 한다.
이 봉화대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서역 일대를 다스렸겠지만 세월 앞에선 승자,패자가 어디 있겠는가.
쿠처=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