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조계에는 가와토히토(變人·튀는 사람)가 너무 없어요."
지난 3일 일본 도쿄 한복판 마루노우치에 있는 주류회사 산토리 직영 레스토랑 히비끼.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법무법인 태평양 이후동 변호사(41·사시 27회)의 목소리 톤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변호사들이 왜 미국만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법연수원 성적이 좋으면 판·검사 하고 해외유학은 무조건 미국으로 가는 한줄서기 문화가 남아있는 한 국가 경쟁력은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할 것 입니다."
시샤모(바다빙어),니쿠자가(감자를 곁들인 쇠고기조림) 등 맛깔스런 안주들이 차례로 테이블 위에 올랐지만 한창 열변을 토하는 그에게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 역시 10년 전 일본 땅을 처음 밟을 때는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했다.
'섭외사건을 담당하면서 미국 연수를 안 가도 되는거냐'는 주위의 우려도 적지 않았다.
한국 변호사로 일본에 진출하기는 이 변호사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작이었다.
그의 가장 큰 일본 내 자산은 일본 도쿄대 법대 석사과정(지식재산권)과 일본 모리·하마다&마쓰모토 및 오에바시 법률사무소 근무 등을 통해 구축해 놓은 폭넓은 인맥.
한국과 일본 2개국 변호사협회에 등록된 사람은 이 변호사가 유일하다.
그는 2002년 3월 일본 변호사협회에 이름을 올리고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은 법률시장이 개방돼 협회의 심사를 통과하면 등록이 가능하다.
그를 벤치마킹해 거꾸로 한국으로 유학,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류(韓流)관련 법률서비스를 싹쓸이하는 일본 변호사도 나왔다고 한다.
그의 일본행은 순전히 '타의'였다.
변호사 3년차인 1993년 1월 3일.
시무식이 끝나자 매니징 파트너인 변호사 선배가 이 변호사와 그의 입사동기생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유학준비 하느라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미안하지만 여러분은 미국으로 못 갑니다.
유학갈 나라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게 회사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로펌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의 95%는 미국으로,나머지 5%는 영국행을 택하던 때여서 반발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분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회사가 여러분에게 투자하는 것"이라는 강요성 설득에 다들 울며겨자먹기로 연수지를 골랐다.
나이순 대로 독일 중국 등을 차례로 뽑고나니 남는 건 일본뿐 이었다.
그러나 일본행은 그가 사시에 합격한 뒤 판·검사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한 것처럼 새로운 인생을 열어줬다.
"한국의 대외무역 거래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에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한·일 간 법률업무의 대부분을 서로에게 외국어인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으니 불편하기도 하고 미스커뮤니케이션의 위험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본 기업들도 남의 나라 변호사가 자기네 나라에까지 와서 법률서비스를 해주니까 고마워합니다."
디저트가 나오자 화제는 다시 한줄서기 문화로 돌아왔다.
"메인스트림(주류)을 벗어나야 도전이 가능합니다."
그 자신도 '온실에서 크는 꽃은 결코 온실을 뚫고 나올 수 없다'는 사법연수원 은사의 말을 인생의 좌표로 삼고 있다.
후배들에게 그는 스페인을 블루오션 삼아 한번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스페인을 알면 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까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거든요." 남들이 가지 않는 길만 찾아나서는 그다운 발상이다.
도쿄(일본)=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