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을유(乙酉)년 새날이 밝았다. 을유년을 상징하는 닭은 새벽의 동물이다. 울음으로써 새벽과 빛의 도래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조상들은 신새벽 닭울음 소리에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했다. 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명을 알리는 닭울음은 한 시대의 시작을 상징하는 서곡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밤에 활개치던 잡귀나 요괴도 닭울음 소리가 들리면 사라지고,산에서 내려왔던 맹수들도 닭은 열두 가지 띠동물(十二支) 가운데 열 번째 동물이다. 시각은 오후 5∼7시,달로는 8월,방향은 서쪽을 가리킨다. 한반도에 언제부터 닭이 살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대부터 닭을 길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신라 건국신화에도 닭이 등장한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도 닭이 한 쌍 그려져있고,신라의 천마총에서는 단지 안에 든 수십개의 달걀이 발견됐다. '본초강목'에는 '조선 닭이 좋다하여 중국의 세력가들은 조선에까지 와서 닭을 구해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과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보(時報)였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닭 울음 소리로 시각을 알았다. 흐린 날에는 닭이 횃대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유시(酉時)를 오후 5∼7시에 배치한 것도 닭이 횃대에 오르는 시간에 맞췄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수탉은 정확한 시간에 울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고 밤이 깊었는지 날이 샜는지를 가늠했다. 고려 때 왕궁에서는 일명계(一鳴鷄) 이명계(二鳴鷄) 삼명계(三鳴鷄)라 하여 자시(子時) 축시(丑時) 인시(寅時)에 우는 닭을 따로 길러 시각을 알았을 정도다. 그러나 닭이 제때 울지 않거나 울 시각이 아닌데 울면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여겼다. 초저녁에 닭이 울면 재수가 없고,오밤중에 울면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해진 뒤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여성의 발언권을 제약하기도 했다. 닭은 또한 귀신을 쫓고 액을 물리치는 상징이기도 했다. 닭 울음 소리와 함께 어둠이 사라지므로 밤을 지배하던 마귀나 유령,가축을 해치는 산짐승도 함께 물러간다고 생각했다. 정초에 닭 그림을 호랑이 용 개 사자 그림과 같이 그려 대문이나 출입구에 붙였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설날이나 대보름날 꼭두새벽에는 첫닭이 우는 횟수를 세어 농점(農占)을 치기도 했다. 첫닭이 열 번 이상 울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반대로 횟수가 적으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나오는 '계명점(鷄鳴占)'이다. 또 음력 정월의 첫 닭날은 상유일(上酉日)이라고 해서 부녀자들의 바느질을 금했다. 이날 바느질이나 길쌈같은 일을 하면 손이 닭발처럼 흉하게 된다고 했다. 일년 내내 쉴 틈 없이 일하는 아녀자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는 배려였을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이날 모이면 싸운다고 해서 모임을 피했고,전라도에서는 곡식을 마당에 널면 닭이 헤쳐 흉년이 든다고 해서 이를 기피했다. 궁합을 볼 때에는 닭띠와 소띠는 잘 어울리고 닭띠와 범띠는 잘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닭과 소,호랑이의 관계 때문이다. 호랑이는 닭이 우는 소리를 무척 싫어한다. 장닭이 홰를 길게 세 번 치고 꼬리를 흔들면 귀신과 호랑이가 민가에서 물러간다고 했을 정도다. 반면 소는 여물을 먹은 후 되새김질을 하면서 닭울음 소리에 맞춰 반추위가 운동과 쉼을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들이 서재에 닭 그림을 걸었다. 닭의 볏이 관(冠)을 쓴 모습처럼 생겨서 입신출세와 부귀공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수탉,즉 공계(公鷄)의 公(공)과 功(공),닭이 길게 운다는 뜻의 鳴(명)과 名(명)의 음이 같은 데에 착안해 공명(功名)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부귀와 공명을 바라는 뜻에서 수탉이 길게 우는 모습을 모란과 함께 그린 민화도 전해져 온다. 모란도 수탉처럼 부귀를 의미한다. 닭과 맨드라미를 함께 그리는 '관상가관(冠上加冠)'의 그림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 변상벽의 그림처럼 어미닭과 열댓마리의 병아리를 그려 자손번창을 염원하기도 했다. 닭은 흔히 다섯 가지 덕(德)을 지녔다고 칭송된다. 닭의 벼슬(冠)은 문(文)을,발톱은 무(武)를 나타내며,적과 용감히 싸우는 것은 용(勇),먹이를 보고 무리를 부르는 것은 인(仁),때 맞춰 울어서 새벽을 알리는 것은 신(信)이라 했다. 닭의 여러가지 덕목 가운데 식용으로 쓰이는 희생의 덕을 빼놓을 수 없다. 농촌에서는 봄에 알에서 깬 병아리를 길러 추석 때 잡아서 명절 음식으로 썼다.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또는 친척의 생일이나 결혼·환갑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는 닭이나 달걀 꾸러미를 선물로 들고 갔다. 특히 씨암탉이 낳은 계란을 모아두었다가 한 꾸러미를 만드는 정성이 대단했다. 결혼식에도 반드시 닭이 필요했다. 신랑과 신부는 닭을 놓고 백년가약을 맺었고,폐백례에서도 닭고기를 놓고 절을 했다. 닭을 길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가운 손님,특히 사위가 오면 장모는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 새날 닭 울음 소리와 함께 그 훈훈한 인심과 정성을 되찾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희망의 서곡으로 삼았으면 한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