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D증권사 임원 김모씨는 요즘 전화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고객인 '김 사장'의 전화 압력에 시달리는 일이 부쩍 잦아진 탓이다. 3년 넘게 거래를 터오는 동안 매너 좋기로 이름났던 김 사장이 몇달 전부터 '본색'을 드러내며 갖가지 무리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 증시가 완연한 침체장세에 들어선 것과 때를 같이했다.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코스닥 등록을 앞둔 기업의 지분을 살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협조 요청'을 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 전부터는 "이쪽에서 자금을 댈테니 '작전'을 하자"며 압박하고 있다. 난색을 표한 김씨에게 돌아온 것은 노골적인 으름장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맡겼다가 날린 돈이 얼만지 아느냐"는 협박성 전화공세를 시도 때도 없이 가하고 있다. 증권시장이 조폭들의 '사냥터'로 농락당하기 시작한 건 2,3년 전부터다. IT(정보기술) 붐을 업고 증시가 급등장세를 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폭들의 '활황장세 올라타기'가 시도됐다. 지난 98년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벤처열풍이 기폭제였다. 일부 조폭들이 주총꾼으로 활동하며 쌓은 노하우를 이용, 코스닥 등록기업의 약점을 잡은 뒤 일정 지분을 빼앗는 '삥뜯기'가 '개발'된 것도 이 시기였다. 대리인을 내세운 M&A(기업 인수.합병)나 A&D(인수후 개발) 등을 통해 '대박'을 엮어내는 등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는 조폭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정치권 실세들까지 연루 의혹에 휘말린 정현준게이트.이용호게이트 등 M&A 관련 대형 스캔들에 거의 빠짐없이 조폭 개입설이 나돌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일부 조폭들은 주도면밀한 '작전'을 위해 소위 '가방끈이 긴' 책사(策士)까지 두고있다. K대 법대를 나와 대기업체에 근무중인 조모씨(34)가 그런 경우다. 91년 대학 재학당시 고향선배를 통해 명동 사채시장 브로커를 만난 그는 "함께 일하면 학비 전액 지원은 물론 10∼15년 정도 지난뒤 개인사업체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에 잠시 '조직'에 몸을 담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서울 경찰청 관계자는 "지방 출신의 명문대생을 입도선매(立稻先買)해 조직의 'CFO(최고 재무관리자)'로 키우는 조폭단체가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전문대 이상 학력을 지닌 조직폭력배들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조폭들에게 증시는 '자금확보의 장(場)'에 그치지 않는다. '작전'이나 M&A를 재료로 특정 종목의 주식을 매매, 주가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보유 자금의 꼬리표를 떼는 데도 증시가 유용하게 활용된다. 매춘이나 청부폭력 등으로 조성한 '검은 자금'을 세탁하는 장소로 증시가 이용되고 있다는 얘기다. 물리력을 동원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들인 기업체를 증시에 상장시켜 어엿한 '기업인'으로 변신한 주먹 출신들도 적지 않다. 때로는 특정 정치세력에 접근, 이른바 '권.폭 유착'을 통해 대형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한다. ◇ 특별취재팀 =이학영 경제부 차장(팀장).김태철.김동민.조성근.최철규.송종현.이상열.오상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