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가의 한국통 몇 명과 점심을 함께 했다.

모처럼 마련된 자리였던 만큼 귀동냥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대우 사태 등 재벌을 둘러싸고 소용돌이치는 한국 경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위협으로 들먹이고 있는 한반도 정세 등을 월가 투자가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속내를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자리가 시작되면서부터 산산이 깨졌다.

궁금한 것이 많기로는 그 쪽이 더 했던지, 이 쪽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들의 궁금증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쏟아낸 궁금증은 다름 아닌 한국 언론의 요지경속 실체였다.

어느 사회건 뉴스 미디어를 접하면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가늠할 수 있는
법인데 한국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의 생각에는 한국 최고의 이슈는 대우 사태를 비롯해 산적해 있는
경제 문제일 것 같은데 정작 한국 언론들은 여자들의 옷 문제를 갖고 왜
그리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 통 이해가 안된다는 얘기였다.

요즘 한국의 신문과 방송들은 대부분 부유층 여자들의 옷 로비 사건으로
도배질돼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평소 한국 언론에 대해 갖고 있던 불만들을 털어 놓았다.

어떤 이슈든지 철저하게 추적하는 법 없이 일과성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끝내기 일쑤라는 비판이었다.

대우의 부도 위기만 해도 사건기사의 시각으로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가
이내 시들해졌다는 것이다.

옷 로비 국회 청문회의 경우도 배경이 된 정.관.재계의 부패 구조를
파헤치기보다는 증인으로 나온 여자들의 말을 가십 수준으로 전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 참석자는 입에 거품을 물고 경제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독일의 언론 유관단체가 최근 발표했다는 세계 최고 신문 랭킹을
거론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1위에 오르는 등 세계 4대신문중 2개를 경제지가
차지했다는 것이다.

경제신문들이 정상을 휩쓴 것은 한탕주의 선정주의보다는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충실히 전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는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경제신문 붐과도 그대로 연결된다.

한국 정상의 경제지인 한국경제신문의 경우 독자들의 구독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최신 초고속 윤전기를 새로 들여와 한창 설치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다.

세계는 바야흐로 경제신문의 시대가 꽃을 피워가고 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