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급서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저는 하루종일 형과의 교분을 되새겼습니다.

형은 진남포상공학교를 졸업한후 일본의 후쿠시마고등상업을 거쳐 1943년
조선은행에 입행하셨습니다.

저는 일본의 오이다고등상업을 졸업하고 일본군대에 끌려간후 1945년 11월
조선은행에 복직해서 서울본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형은 그때 벌써 대부심사를 담당하는 여신부의 중견행원으로 이름을 날렸고
저는 발권부의 한구석에서 선망의 눈으로 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형하고 가까이 일을 함께 하게된 것은 1949년 9월이지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1948년 조선은행에서는 행내에 중앙은행설립에 관한
특명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각국의 중앙은행제도를 연구하여 중앙은행법안을
기초 1948년말에는 그 성안을 정부.국회.ECA 기타 관계 각 방면에 건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정부에서는 재무부내에 재정금융위원회를 설치하여 동위원회로하여금
조선은행의 건의안을 참고로하여 1949년초에는 재무부의 최종안을 결정하였
습니다.

조선은행건의안은 중앙은행의 통립을 기본으로 삼은것이었고 재무부안은
정부의 감독을 받는것을 기조로 한것이었습니다.

두 법안의 기조가 근본적으로 다르자 정부는 중앙은행법안의 중요성과
국제성에 비추어 입법절차에 옮기기 전에 외국의 사계권위자에게 검토와
협력을 얻고자 1949년6월 미국의 중앙은행기구인 영준비제도이사회에
전문가의 파견을 의뢰한 결과 금융이론의 권위자인 당시 뉴욕연방준비은행
국제수지국장인 부룸필드 박사와 동은행 감사국차장 "젠슨"씨가 동년 9월초에
내한하게 되었습니다.

양씨는 내한후 약 5개월간 재무부.조선은행.ECA당국의 협력을 얻어 우리나라
금융제도의 연혁과 경제상태를 조사하고 정부안과 조선은행안을 참고로 하여
한국은행법안과 은행법안을 기초하게 되는데 그때 조선은행으로서는 조사부
차장이던 장기영시 주관하여 신병현씨 진경득씨가 번역과 통역을 돕고 나는
법제관격으로 영문식 법제문을 한국식 법제문으로 법문화하는 것을 담당하게
되어 매일 머리를 맞대고 일을 하였습니다.

양씨가 기초완료한 초안을 재무부 이재국장 법제처 경제국장 경제법제관
조서는행 조사부장의 4인 특별위원회에서 심의하게 되었을때 형과 나는 이
위원회의 사무보조로 임명되었습니다.

한국은행법은 많은 산고끝에 1950년5월5일자로 공포되어 한국은행이 6월에
설립되었습니다.

그후 내가 1959년4월부터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정부에 파견나갔을때 형은
한은조사부장으로서 많은 지원과 조언을 해주었고 1960년10월 보직없이
한국은행에 북귀했을때 자유당정부의 고위공무원을 했다고 은행내외에서
바람이 거셀때 형의 강력한 주선으로 나는 뉴욕사무소장으로 겨우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미 대사관의 경제참사관으로 부임해온 형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5.16혁명이 나 형은 대사관을 사직하고 나도 귀국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난지 6개월만에 솔가해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귀국할때까지 형은 미국대학에 직장을 구하고 있던중이어서 나는 귀국여비를
뺀 나머지 미달러를 모두 형의 가족들의 수개월간의 생활비에 보태쓰라고
송금하고 작별했습니다.

그후 형은 인간적으로 교분이 두텁던 미국 중앙은행 및 IMF와 세계은행의
친구들 주선으로 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후 세계은행의 조사역으로
취직이 되어 겨우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1969년 박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후 1970년 세계은행 교체이사
자리가 났을때 나는 5.16혁명후 형의 부인이 와싱턴에 체류하고 있는 전직
한국군장성 몇명들과 백악관 앞에서 5.16혁명 규탄데모를 한 사실을 솔직히
보고하면서 그러나 형의 고결한 인격과 탁월한 식견에 비추어 교체이사의
적격자라고 천거하지 박대통령은 흔쾌히 승낙을 하였고 그후 75년에는
대통령경제담담특별보좌관 그리고 78년에는 한국총재로 기용됐습니다.

형은 전대통령에 상공장관, 두번의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하고
무역협회회장, 전국은행연합회장도 역임했습니다.

형은 평생 책을 놓지 않았고 근면 노력했으며 아첨을 모르고 언제나 정도를
소신껏 걸었습니다.

형이 우리나라 경제에 이바지한 크나큰 공적을 되돌아보며 형의 고결하고
탁월한 식견을 추모하면서 형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형의 일생은 정말 값어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1999년4월5일

김정렴 <전 박정희대통령 비서실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