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씨가 20일 서울에 안착함에 따라 망명신청이후 67일간 전개됐던
남북한 외교전은 우리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황씨가 주중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망명을 신청한 지난 2월12일부터 35일간
북경을 무대로 전개됐던 전반부는 남북한 외교전과 관련국과의 물밑교섭이
숨가쁘게 전개됐던 반면 필리핀으로 이동한 3월18일이후 후반부는 별다른
곡절없이 서울도착으로까지 이어졌다.

황씨의 필리핀 체류는 철저한 보안으로 인해 별탈없이 진행된데 반해
북경체류기간은 피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는게 정부관계자들의 전언
이다.

유력한 경협파트너인 한국과 사회주의혈맹인 북한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등거리외교를 해온 중국은 황씨의 망명에 대해 "황당한 일로서 중국이 가장
원치 않는 사태"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중국관계자들은 처음에는 사태파악에 필요하다며 시간을 끌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우리 협상대표단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중국측은 황씨의 자유의사를 확인한 지난 2월말께서야 "제3국 경유 한국행"
을 수용했다.

중국을 상대로한 남북한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남북한 관계자들이
중국외교부에서 마주칠뻔한 순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협상단의 일원이었던 한 관계자가 중국외교부에 마련된 등소평의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는 순간 북한측 관계자들이 조문을 위해 막 차에서
내리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우리 협상단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호텔을 2~3일에 한번씩
바꾸고 호출기를 이용해 대사관과 연락을 취하는가 하면 중국식 양복을 입고
위장하기도 했다.

정부는 중간경유지 선정에도 적잖이 신경을 썼다.

외무부는 호주등 대양주국가는 지리적으로 멀어 제외했고 한때 유력하게
거론됐던 싱가포르는 북한공관과 무역대표부까지 나와 있어 제외했다.

필리핀이 중간경유지로 낙점된 것은 전통적으로 한국과 우호관계가 돈독
하고 김영삼대통령과 피델 라모스대통령간의 개인적인 친분이 각별한데다
필리핀이 우리측 제의에 대해 처음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외무부관계자는 전했다.

특히 라모스대통령은 6.25당시 필리핀군 소대장으로 참전한 것은 물론
국방장관 재직시절인 90년 우리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하는 등 여러차례
방한한 친한파여서 황씨의 체류에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김삼규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1일자).